연작소설
[목차]
◑ 구약의 말들이 죽지 않고 살아서
♬ 프롤로그
♬ 기이한 죽음
♬ 다시 돌아온 죽음
♬ 안팎의 고립
♬ 저주파의 교란
♬ 사교의 주술
♬ 탈출
♬ 격리
♬ 붕괴
♬ 피란
♬ 에필로그
* <붕괴> 줄거리
존비들이 저주파에 반응해 성문을 공격하면서 성곽의 상황이 점점 악화되고 있다. 저주파는 존비뿐 아니라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를 증폭시켰고, 사람들은 저주파의 영향을 받으며 의심과 분노로 혼란에 빠진다.
한편, 창고에서 이질적인 망아지가 태어났고, 신약을 든 사내가 이를 구하려 시도한다. 그즈음 유다인 이사장이 변한 괴수로 인해 성문이 무너지고, 그와 함께 거대한 괴수가 등장해 성곽을 파괴하며 대혼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사내와 망아지는 혼돈 속에서도 조용히 성문 밖으로 향한다. 이후 망아지와 사내, 괴수가 빛과 함께 사라졌다는 전설이 남고, 마을 사람들은 그날의 사건을 기억하며 사내와 망아지와 괴수에 대해서는 모호한 소문만이 남는다.
#4
이곳저곳에서 별다른 징후가 없던 사람들이 갑자기 존비병의 증상을 보인다는 보고가 잇달았다. 그 현상은 너무나 갑작스럽고 기괴했다. 사람들은 이유도 모른 채 하나둘 쓰러지고, 그 와중에 더 끔찍하고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배요섭은 신약을 가져온 사내를 모시고, 그 소문의 진원을 찾기 위해 3번 창고로 향했다.
그곳에서 한 여인이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아이를 낳은 것이 아닌, 뭔가 끔찍하고 이질적인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창고에 가까워질수록 그곳의 공기는 점점 더 무겁고 차가워졌다. 무언가 악몽 같은 분위기가 그곳에 짙게 깔려 있었다. 배요섭은 무거운 마음으로 사내를 모시고 창고 문을 열고 들어섰다.
사내를 모시고 들어선 배요섭은 어색하고 긴장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창고 안의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무거운 침묵 속에 서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은 생명체라고 하기에도 너무도 이질적이었다. 사람들은 처음 그 생명체를 보고 숨을 멎은 듯 멈춰 섰다. 그들의 눈앞에는 성 안에서 빌딩을 부수던 괴물을 축소해 놓은 듯한 망아지가 서 있었다. 망아지의 앞발은 인간의 손과 같았고, 얼굴은 말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며, 이족보행이 불편한지 말의 뒷다리로 일어선 채로 비틀거렸다.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도드라진 다리는 어린 생명체와는 어울리지 않게 과도하게 빠른 성장 탓인 듯했다. 갓 태어난 듯 몸집은 작고 미숙했지만, 그 외형은 일반적인 망아지와는 전혀 달랐다. 망아지는 간신히 몸을 지탱하며 비틀거렸다. 다리 하나하나가 무거운 돌을 이끌듯 휘청거리며 뒤뚱거렸고, 고개는 아래로 축 처진 채 무언가를 찾는 듯이 허공을 더듬었다.
그 망아지의 피부는 축축하고 푸르스름한 빛이 감돌았다. 그 색깔은 마치 병든 것처럼, 아니면 살아서는 안 될 존재처럼 보였다. 근육은 마치 끊임없이 꿈틀대며 뒤틀리는 듯했고, 그 모양새는 보는 이로 하여금 불쾌함과 두려움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생명체는 비틀거리며 한 발 한 발을 내디뎠고, 그 발걸음은 마치 무언가에 의해 억지로 움직이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웠다. 망아지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그 눈은 텅 빈 구멍처럼 보였다. 눈동자는 있었지만, 생명체로서의 빛이나 의지는 전혀 없었다. 그 눈에는 공허와 기이함만이 가득했다.
사람들은 그 기괴한 망아지의 움직임을 보고도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지만, 그들의 손은 떨렸다. 망아지의 존재가 비이성적일 만큼 괴상하게 느껴졌고, 그것을 죽이는 순간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 망아지를 죽이는 행위는 단순한 살해가 아니라, 저주받은 운명에 발을 들이는 것 같았다.
“저 녀석을 없애야 해!”
누군가 외쳤지만, 소리는 바람에 흩어지듯 공허하게 사라졌다.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긴장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무기나 도구를 들고 망아지를 향해 나아가려는 이들조차도 뒷걸음질 쳤다. 공기는 차갑고 무거웠으며, 그 속에서 시간은 마치 멈춘 듯 느리게 흘러갔다.
그때, 사람들 사이에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나타나자마자 사람들은 마치 그에게서 어떤 구원의 신호라도 찾으려는 듯 눈길을 보냈다. 그는 신약을 전하는 자로 알려진 사내였다. 그의 차분한 발걸음과 냉정한 표정은 혼란스러운 사람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고요해 보였다. 그의 존재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고, 그의 움직임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그는 이 상황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던 것처럼, 망아지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사내는 망아지를 향해 다가갔고, 그가 다가가자 망아지는 잠시 멈춰 그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창고 안의 공기는 더욱 무거워졌다. 사람들은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긴장했다. 그의 발걸음은 조용했고, 그의 눈은 망아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 망아지와의 짧은 대치 속에서 사내는 무언가를 속삭이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말소리는 너무나 낮아 누구도 들을 수 없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의식을 치르는 듯한 느낌을 주었고, 주변의 사람들은 그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몰라 더욱 두려워졌다.
그러나 그 찰나의 순간, 저 멀리서 무거운 굉음이 터져 나왔다.
“쿵!”
땅을 뒤흔드는 소리가 마을 전체에도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동요했고, 누군가는 바닥에 엎드리기까지 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성곽이 무너지고 있어!"
급하게 마을을 가로지르던 누군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멀리서 전해져 오는 두 번째 굉음은 더욱 거세게 성곽을 흔들었고, 마침내 그들의 귓가에 그 끔찍한 소식이 전해졌다.
거대한 말 형상의 괴수가 성벽을 무자비하게 두드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무엇으로 들이받는지는 모르지만, 성문이 부서질 정도로 강력한 타격이 이어지고 있고, 부서진 성곽 위를 거닐던 존비들도 계속 해서 성곽 바깥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미 마을에서도 성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음에 시끄러워졌다. 성문을 들이받는 소리 같았다. 들리지 않을 거리임에도 이상하게 분명하게 마음에서부터 울렸다. 발바닥에 전율이 느껴지는 듯했다. 엄청난 무언가가 성곽에 부딪혀 거대한 힘으로 밀어붙이는 충격이 증폭되어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돌이 갈라지고 쇠가 찢기는 소리가 이어졌고, 그들은 그저 그 상황을 가만히 앉아서 감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싫다면 어디로든 도망쳐야 했다.
신약을 전하던 사내는 차분한 눈으로 그 상황을 지켜봤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이 읽히지 않았지만, 마치 모든 것을 예견한 자처럼 무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성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점점 커지는 긴장 속에서 그는 홀로 고요한 중심에 서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신약은 마치 이 모든 혼돈 속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희망의 조각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희망이 이 상황을 바꿀 수 있을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사내는 고요히 숨을 들이쉬고는 망아지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고, 그의 손은 신약을 단단히 쥐고 있었다. 그 순간 창고 안의 공기는 전보다 차가워졌고, 모든 이들은 숨을 죽였다. 그의 손끝에서 희미한 빛이 퍼져 나왔다. 그 빛은 망아지를 향해 다가가며 그 기괴한 형상을 감쌌다. 망아지는 그 빛을 받으며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두려움과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 같았고, 그 소리는 창고 안에 메아리쳤다.
사람들은 그 빛을 바라보며, 그들이 느끼던 공포와 불안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짙은 안개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비치는 것과도 같았다. 그들은 조금씩 진정되었고, 그 빛 속에서 희망을 보았다.
하지만 희망이 완전히 퍼지기도 전에, 성곽을 뒤흔드는 또 한 번의 굉음이 울려 퍼졌다. 멀리서 들렸지만 사방에서 광범위하게 울렸고, 알게 모르게 사방에서 저주파끼리 엮어서는 무더운 습기처럼 넘실대고 있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은 그 사내에게로 향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고, 그의 손은 조용히 신약을 품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신약을 망아지 쪽으로 내밀었다.
“이제 같이 가자꾸나.”
주변의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인 채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의 손끝에서 빛이 더욱 강하게 퍼져 나갔다. 빛은 저주받은 운명을 밀어내듯 창고 안을 덮고 있던 무거운 기운을 서서히 걷어냈다. 사람들은 그 빛을 바라보며 희망을 보았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불안이 남아 있었다. 빛이 아무리 강해도, 당장의 앞에 놓인 거대한 공포를 물리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망아지는 손을 내미는 법을 모르는지 잠깐 망설였다. 사내는 망아지에게 조금 더 다가가 그것의 손을 잡더니 방향을 틀어 문 밖으로 나섰다.
배요섭은 그 모든 것이 당황스러웠다. 망아지가 두려워 사내를 따라나서지도 못하겠고, 그렇다고 사내의 짐을 들어주곤 했던 의리를 저버리기도 난감했다. 해산한 여인은 자신의 아기를 보내면서도 차마 잡지 못했고, 기둥에 묶인 존비들은 신음하고 있었다.
#5
사람들의 고통은 시간이 흐를수록 눈에 띄게 심각해져갔다. 한눈에 봐도 그들의 모습은 불안정해 보였다. 머리를 움켜쥐며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었고, 눈이 퀭해져서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다 결국 바닥에 쓰러지는 이들도 속출했다. 그들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해 있었고, 붉은 핏기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듯 피곤해 보이는 눈 밑은 푸르스름하게 그늘져 있었으며,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피로감은 고스란히 몸에 배어 있었다.
길가에서는 사람들이 메스꺼움에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구토를 했다. 그들이 토해낸 것은 흙바닥을 끈적하게 적셨고, 공기 중에 씁쓸한 냄새가 퍼져나갔다. 마을 전체가 마치 병든 존재처럼 공포에 짓눌려 있었다. 고통에 찬 신음이 이곳저곳에서 흘러나왔고, 그 소리들은 점점 커져 마을을 뒤덮었다. 그들의 몸짓은 나약하게 떨렸고, 눈빛은 공허했다. 피곤함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자, 사람들 사이에서는 짜증과 분노가 서서히 번지기 시작했다.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어머니의 다리에 매달려 겁에 질린 채 울부짖었다. 아이들은 소리를 질러도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하자 더욱 두려워하며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다른 쪽에서는 성인들마저 두려움에 서로를 밀쳐내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들은 상황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본능적으로 누군가를 원망하며 서로에게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서로에 대한 신뢰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고, 남은 것은 불안과 혼란뿐이었다.
공기는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마치 그 자체로도 사람들을 짓누르는 것처럼 답답했고, 숨 쉬는 것조차 힘겨울 만큼 눅눅한 기운이 퍼져 나갔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썩은 냄새는 사람들의 불안을 부추겼고, 곧 마을 전체에 스며들어 사람들을 질식시키는 듯했다. 마을 한가운데서 비명이 터져 나왔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 순간, 사내와 배요섭이 모습을 드러냈다. 군중의 시선은 그 즉시 두 사람에게로 쏠렸다. 그들만이 모든 혼란의 원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람들은 곧바로 경계심을 드러냈다. 두 사람을 향해 날카로운 눈빛들이 쏟아졌고,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조심스러움 대신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람들은 사내와 배요섭을 보자마자 흥분하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흉측한 망아지를 끌고 뭘 하려는 거야!"
누군가 외쳤고, 그 소리는 곧 다른 사람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몇몇은 이미 손에 돌멩이를 들고 있었고, 언제라도 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듯했다. 사소한 충동 하나에도 폭발할 듯 보였다. 배요섭은 뭔가 말하려 했지만, 무슨 말을 해도 이 상황을 진정시킬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입술을 다물었다. 순간적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고 싶어 고개를 숙였지만, 사내는 화난 군중을 조용히 응시했다. 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고, 손에 들고 있는 신약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왔다. 군중은 그 빛을 보자 잠시 눈을 찡그렸고, 일순간 분위기는 팽팽하게 얼어붙었다.
바로 그때, 마을 어귀에서 갑자기 커다란 창고 문이 쿵 하고 열리더니, 그 안에서 존비 두 마리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엔 그저 말처럼 보였지만, 가까이 다가오면서 그들의 눈빛과 움직임이 인간의 흔적을 지닌 기괴한 모습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들은 무언가에 홀린 듯, 서서히 그러나 단호하게 사내와 망아지를 향해 다가왔다. 그들의 움직임은 느렸지만, 그 발걸음에서 뚜렷한 목적이 엿보였다.
존비들의 출현에 사람들은 순간 얼어붙었다. 몇몇은 뒤로 물러났고, 다른 이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손에 쥔 도구마저 떨렸다. 누군가가 곡괭이를 들고 나와 외쳤다.
"저놈들을 없애야 해!"
군중 속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고, 총성이 울리며 존비를 향해 총알이 날아갔다. 그러나 존비는 총에 맞고도 멈추지 않았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전진하며 마치 강력한 힘에 의해 계속 나아가는 듯했다. 몇몇 사람들은 존비의 이빨에 물려 피투성이가 되었고, 그들의 비명은 점점 더 커져 갔다.
존비들은 피를 맛보며 기괴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 소리는 짐승의 포효와도 같았으므로, 물린 사람들은 살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존비의 강한 손아귀에 사로잡혀 빠져나갈 수 없었다. 그들의 절망 어린 비명이 마을 곳곳에서 메아리쳤고, 그 순간 군중의 마음속에서 남아 있던 마지막 싸울 의지마저 사라져버린 듯했다. 사람들은 무기력하게 뒤로 물러섰다. 이제 그들의 목적은 살아남기 위해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사내는 그런 사람들을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차분했고, 손에 들고 있는 신약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배요섭은 사내의 옆에서 그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며 조용히 입을 열려 했지만, 목이 잠겨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의 심장은 터질 듯 뛰고 있었고, 손바닥은 이미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물러날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내는 신약을 쥔 채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주변의 혼란 속에서도 그의 발걸음은 확고했고, 그는 존비들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갑자기 존비 중 한 마리가 빠른 속도로 사내를 향해 돌진해왔다. 군중은 경악했고, 그 순간 사내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신약을 앞으로 내밀었다. 신약에서 나온 빛은 존비의 얼굴을 감싸며 그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꾸야악!”
존비는 비명을 지르며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무릎을 꿇었고, 몸에서 끈적한 액체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 액체는 마치 저주의 기운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처럼, 존비의 몸을 서서히 녹여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공포는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곳에는 새로운 희망의 빛도 존재했다. 사내의 신약이 그들의 유일한 구원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조금씩 피어오르고 있었다.
“내가 오거든 나인 줄 알거라.”
사내가 허공을 보면서 말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불명확했으나, 저마다 자신에게 하는 말 같다는 착각도 들었다. 배요섭도 그랬다. 이미 온 사람이 떠났다가 다시 온다는 말인지, 또 왜 그가 오면 그인 줄 알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그 말을 귀담아 듣게 하는 묘한 분위기였다. 의심으로 가득했던 사람의 마음에도 문이 살짝 열렸던 것이지만, 그리 오래 열려 있지는 않을 게 뻔했다.
#6
기어이 성문이 부서졌다. 거대한 충격과 함께 뚝뚝 금이 가더니, 마침내 거대한 파편을 내며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먼지가 피어오르고, 잔해들이 굉음을 내며 땅에 흩어졌다.
사내가 망아지와 함께 성문 앞에 도착했을 때, 이미 성문은 무너지고 있었다. 배요섭은 사내에게 변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하여 약간의 거리를 두면서도 시선을 떼지 않고 뒤따랐다. 말의 얼굴을 지닌 망아지는 이질적인 존재로, 모든 시선을 끌었다. 망아지는 사내의 손을 잡고 뒤뚱거리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망아지가 뒤뚱거리며 발을 내딛을 때마다, 땅에 닿는 발굽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그 발은 온전히 말의 것도, 사람의 것도 아니었다. 한순간은 말의 균형을 유지하는 듯싶더니, 이내 사람처럼 두 발로 어색하게 버티고 있는 모습이 기이했다. 사람의 몸집보다 작은 그 생명체가 지닌 존재감은 뿜어져 나오는 위화감으로 인해 더욱 커 보였다. 눈앞에서 마주친 그 모습은 차마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내 그 얼굴, 분명히 말의 형상을 한 얼굴이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주위를 맴도는 긴장감은 망아지의 걸음걸이와 함께 점점 더 짙어졌다.
사람들은 멀리서 지켜보며 경계했고, 일부는 그 기괴한 모습에 저주의 기도라도 하듯 뭔가를 중얼거렸다. 어딘가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듯한 표정, 그에 반해 평온하게 흐르는 눈빛이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망아지는 마치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는 듯,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사내를 따를 뿐이었다.
그때 성벽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멀리서 들려오는 거대한 발소리와 함께 성문의 일부를 부수고 머리를 빠끔 내미는 괴물의 모습을 목격했다. 그 괴물의 존재를 보고 그들은 그제야 깨달았다. 저 멀리 성문을 때려 부수고 있는 거대한 존재는 단순한 괴물이 아니었다. 5층 아파트 크기만 한 괴수의 얼굴은 말과 사람의 모습이 반반씩 섞여 있는 채였는데, 한 번이라도 유다인의 사교에 드나들던 자들이라면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다인 이사장이었는데, 너무도 빠르게 말 형상의 괴수로 변하더니, 그 후로는 자신의 의지나 이성과 상관없이 존비들을 이끄는 것 같았다. 사실 누가 이끈다기보다는 서로가 저주파에 엮인 채,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고 해야 하지만, 저주파를 가장 선명하고 강력하게 내뿜는 괴수 중 하나가 유다인 괴수였던 것이다. 비록 말의 형상으로 변했으나, 그 얼굴에는 여전히 유다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괴물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건... 유다인 이사장이야..."
그들은 유다인의 얼굴이 남아 있는 괴물을 보며 절망감을 느꼈다.
하지만 가장 큰 위압감을 주는 존재는 고층 빌딩을 부수며 하늘로 치솟은 듯 거대한 괴수였다. 그 거대한 괴물이 성문을 부수고 성 밖으로 나온다면, 그들에게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을 것이고, 대적조차 할 수 없을 게 자명했다. 그리고 거대한 괴수가 성벽을 부수고 나오는 건 시간문제로 보였다. 괴수는 거대한 앞발을 들어 성벽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성벽은 거대한 충격에 의해 금이 가기 시작했고, 돌덩이들이 성벽에서 떨어져 나갔다. 성벽은 마치 고통에 몸부림치는 생명체처럼 굉음을 내며 서서히 붕괴되고 있었다. 충격이 가해질 때마다 성벽은 크게 흔들렸고, 그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균형을 잃고 쓰러지며 혼란에 빠졌다. 괴수의 거대한 앞발이 성벽을 내려칠 때마다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몇 번의 공격이 더 이어지자 성벽의 상단에서 5분의 1가량이 무너져 내렸다. 돌과 파편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흩어졌고, 그 무너지는 소리가 공기 속을 가로질렀다. 다 무너지면 성 안의 모든 존비들이 성 밖으로 기어 나올 것이었다. 한편, 성곽으로는 계속 계단을 통해 올라가는 말들이 있었다. 괴수가 성벽을 부수는 소리에 자극을 받아 그 지점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사냥감이 떨어진 채로 다시금 자기들끼리 피비린내 나는 다툼을 벌이는 악순환의 덫에 걸릴 상황이었다. 우연히 성 밖으로 떨어진 존비들 몇몇은 처음에는 감시병들에게 제거되었으나, 곧 그 숫자가 점점 늘었고, 기어이 유다인 괴수가 성문을 부수려 하자, 존비들은 그 행동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도심지로부터 거대한 소음을 내며 성곽으로 다가온 대괴수가 성곽을 부수기 시작하니, 성벽으로 가로지른 성 안과 밖의 경계가 곧 없어질 찰나였다.
그때 유다인 괴수가 먼저 성문의 일부를 부수고는 머리를 빠끔 내민 뒤 무작정 앞으로 전진하려고 했다. 다른 존비들도 계속 성문으로 몰려들었으므로, 성문들은 그들의 힘과 무게를 이기지 못했다. 그렇게 성문이 부서지자 유다인 괴수는 폭주하듯 앞으로 뛰쳐나갔고, 그의 육중한 몸이 성문을 넘어 성 밖으로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땅이 진동했고, 모든 것이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곧장 사람들이 쳐놓은 함정에 빠졌다. 땅속에 세워진 죽창에 온몸이 꿰뚫린 채로도 유다인 괴수는 여전히 꿈틀거리며 발버둥 쳤다. 구덩이 속에서 그의 몸부림은 계속되었고, 그는 절망적으로 몸을 뒤틀며 그 자리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밀려나오는 존비들이 그 위에 쏟아지며 죽창에 꽂혔다. 유다인 괴수의 거대한 앞발이 구덩이 벽을 긁어내며 흙과 돌을 흩뜨렸다. 성문을 무너뜨리던 그 강력한 힘도 이제는 자신을 파멸로 이끌었던 그 함정 속에서 무의미하게 소진되고 있었다. 구덩이는 계속 빠져 들어가는 존비들로 메워졌고, 그 안에서 버둥거리는 괴수의 모습은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그 거대한 존재는 차츰 보이지 않았다. 존비들과 뒤섞인 채 죽지도 못한 채 버둥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괴수는 죽지 않았다. 존비도 죽지 않았다.
구덩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그 장면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괴물이 죽기를 바라며, 그들의 눈에는 간절함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그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괴물의 몸부림을 보며, 그들이 처한 현실의 가혹함을 다시금 깨달았다. 언제든 자신이 그러한 처지가 될 수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불안과 혼란이 다시 급속도로 퍼졌다. 아이들은 부모의 품에 안겨 울부짖었고, 성벽 가까이에 있던 이들은 당장이라도 도망치려 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은 악몽 같았다. 일부 병사들은 무기를 꽉 쥔 채로 떨고 있었고, 다른 이들은 두려움에 휩싸여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지휘관들이 필사적으로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지만, 그 명령은 허공에 흩어지는 메아리일 뿐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미 싸울 의지가 사라지고, 생존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쿵! 쿵!
계속해서 성문의 오른쪽 편 성곽에서는 돌무더기가 쏟아지고 있었고, 그쪽으로도 점점 존비들이 쏟아져 내렸다. 성문 앞 구덩이를 괴수와 존비들이 다 메우자, 뒤에서 달려오던 존비들은 그들을 밟고는 성 밖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그 순간에 망아지는 사내의 손을 꼭 잡고 천천히 성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 작은 눈동자에는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이 가득 차 있었다. 그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세상에 대한 궁금증만이 남아 있는 듯했다. 이질적이고 비현실적인 분위기 속에서, 존비들은 이상하게도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들이 다가올 때마다 존비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 그들을 피해가는 듯했다. 무자비하게 모든 것을 덮치던 그들이, 망아지와 사내 앞에서는 금기를 지키듯 행동했다. 주변이 온통 혼돈에 휩싸였지만, 그 둘은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처럼 고요하게 걸어갔다.
그러나 그 고요함도 오래가지 않았다. 배요섭과 함께 있던 마을 사람들이 성문을 뚫고 쏟아져 나오는 존비들과 마주쳤을 때, 다시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며 발길을 돌린 사람들은 마을로 돌아가기 위해 달렸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빠르게 덮쳐오는 존비들의 물결에 속수무책으로 물리고 말았다. 존비들에게 물린 사람들의 비명이 퍼져나갔고, 순식간에 혼란은 최고조에 달했다.
배요섭은 필사적으로 망아지와 사내를 다시 보려 했지만, 급박한 소란 속에서 그 둘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사내와 망아지는 길에서 갑자기 사라진 듯 보였지만, 아무도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했다. 그나마 눈에 띄던 대괴수마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성 안과 밖을 가리지 않고 질주하는 존비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후일, 이 사건에 대해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누가 퍼뜨렸는지 모를 허황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성문이 무너진 날의 혼란 속에서 사라진 망아지와 사내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전설처럼 변해갔다. 그날 사내가 망아지를 데리고 대괴수 앞에 섰을 때, 사내가 고요하게 "이제 갈 때가 되었지요. 이곳 일은 이곳에 맡깁시다"라고 말하자, 갑자기 사내와 망아지와 대괴수가 있던 주변이 온통 눈부신 빛으로 물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순간 대괴수, 사내, 망아지 모두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때 거대한 구덩이 밑에 깔려 있던 유다인 괴수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사라진 이상한 존재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끝내 아무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