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의 제왕, '홀(hole)이랑 서(書)'

에세이

by 희원이

누군가가 “뭐하고 사세요?”라고 물을 때,

제법 당당하게 “프리랜서요”라고 답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전에는 ‘백수예요’, ‘알바 중이요’라며

얼버무리기 일쑤였는데, 그즈음에는 마치

이게 무슨 자랑이라도 되는 것처럼 힘주어

‘프리랜서’라고 말했는데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때 내 모습이

가끔 우습게 느껴진다.


어쨌든 나는 밀림에서 약점을 노출한 작은 짐승도 아니고,

놀랄 것 없는 99세의 노인도 아니며,

하얗게 센 수염을 가진 것도 아니고,

맏형수는 더더욱 아니니

절대 백수가 아니었다.

이쯤 되니 나는 백수와는 거리가 먼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든다.


그러나 세상은 묘하게도 그런 나를

‘프리랜서 백수’라 부르길 주저하지 않았다.

일 년에 한 번 일해도,

매일같이 쫓기며 일해도,

억대 연봉이든

만 원 벌이든

모두 프리랜서인 건 변함없다. 그렇다.

'프리랜서'라는 칭호는 지갑 속 두께와 관계없이,

때론 허전한 모호함으로 남는다.


가끔은 느슨해질 때가 있다. 명분이 있고, 가족들이 그럴듯하게 ‘열심히 일한다’며 응원해줘도,

마냥 배를 튕기며 책을 읽다 보면

프리랜서라는 본분도 쉽게 망각되곤 한다.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사자의 긴박함이 없는 나는

마치 느긋한 사자처럼 배부른 듯 서성거린다.


(이제는 돌아가신) 아버지는 그런 내게 ‘인가난 백수’라 불러주셨다.

헛웃음이 나오면서도 틀린 말은 아니다. 매일 바쁘게 움직이려 애쓰지만, 통장 잔고를 볼 때마다

백수의 본질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차라리 고독한 제왕이 된 듯한 ‘백수건달’의 타이틀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결국 ‘프리랜서’라는 기백 넘치는 타이틀도

현실의 무게에 눌려 모호해질 때가 있다.

백수의 제왕으로 자처해도, 프리랜서의 기운이 시들어

‘홀(hole: 구멍)이랑 서(書)’가 된 나를 발견할 때, 비로소

현실을

깨닫는다.


돛만 보일 정도로 멀리 떠 있는 고깃배처럼,

내게 필요한 것들은 저 멀리 아득하다.

혹은 탄약 없는 빈 탄약통,

그저 헐렁한 껍데기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역시 글로 먹고살려는 발상 자체가

어찌 보면 무모하지만, 그럼에도

한때 나는 ‘홀이랑 서’로 남기를 선택했었다.

지금은 열심히 출퇴근하는 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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