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목차: AI와 독자]
◑ Part 1. AI와 창작
♬ 거장 AI, 너의 이름 파이오니아
♬ AI 발달의 다섯 시기와 일곱 단계
♬ 파이오니아의 여명, 티핑포인트 전반기까지
♬ 인간 문명에 AI가 존재감 있게 등장한 순간
♬ 파이오니아의 출현
♬ 파이오니아의 후폭풍, 저작권 저인망
♬ 파이오니아 저작권 저인망 시대는 오발탄일까
♬ 파이오니아와 인간 예술가
◑ Part 2. 작자에서 독자로
(생략)
◑ 에필로그
[소개글]
- 놀이글 스타일을 적용한 몽상적 산문입니다. (생략, 더보기)
- 이미지 모두 고흐의 작품입니다.
- 이 꼭지는 분량상 3편으로 쪼갰습니다.
- 여기서는 예술 분과를 넘어 AI를 사회적으로 바라본다. 전체 흐름을 갈무리한 뒤, 예술 창작 분야로 좁힐 예정이다. / AI와 인간의 경쟁은 티핑포인트 시기에 극렬해지고, 어쩌면 인간이 AI에게 반발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다. 이때 되돌릴 것을 되돌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은 AI보다 더 강력한 힘을 지닌 자본주의 체제 아래 있기 때문이다. AI로 많은 것이 바뀐다고 해도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흔들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AI도 자본주의에 귀속되는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본주의에 체득된 가치만이 있는 건 아니다. 자본주의가 수많은 체제 중 민주주의와 결합한 덕분에, 현대의 시민은 민주적 가치를 통해 여전히 공동체의 가능성을 점검하려 한다. / AI를 중심에 두고, 정부 기업 그리고 시민 간의 파워게임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누가 이기느냐 하는 차이일 뿐, 선진국이나 후진국(독재국가)이나 엇비슷한 현상을 보인다.
뭐라도 안 하면 망하오.
그것을 위해 기업으로부터 막대한 세금을 걷어서 뭔가를 도모하려고 하겠죠. 아예 국민의 삶 자체에 관심이 없어서 방치하는 무능하고 멍청한 독재자가 아니라면 말이죠.
선의의 지도자가 이런 시도를 할 때, 선진국이라면 약간의 진통만을 겪으면서 ‘기업이 AI와 로봇으로 벌어들일’ 막대한 이익 중 일정 액수를 세금으로 확보할 걸로 봤어요.
물론 기업의 ‘백래시’ 사례도 있을 거예요. 아주 격렬한 반발이요. 예를 들어 남미의 한 국가에서 마약 카르텔이 정부에 격렬히 저항하듯이요. 남미의 환경 운동가들이 생명의 위협을 받듯이요.
“사는 것이 필사적인 데가 있지요. 옳은 쪽이든 부정한 쪽이든.”
상황이 더 악화되어 기업이 정부를 장악해버리면서, 정부를 기업의 심부름센터로 만들어버린다면 어찌 될까요? 막대한 부를 쌓아서 국가 단위를 넘어서는 과정에서 기업이 사병을 소유하는 방식으로 흘러갈 수도 있어요.
“역사에서 보면, 조선 시대 초에도 사병 혁파는 중요한 문제였어요. 노론의 군권 장악은 또 어떤가요? 정규 군대마저 사병처럼 오용된 순간이 있었다는 거죠. 고려시대 때도 광종 재위기에 개국 공신들의 사병을 혁파하기 위해 노력했었죠. 노비안검법도 이런 맥락에서 시행된 것 맞죠?”
“하기야 지금 보아도 있을 법한 합리적인 상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아프리카의 탄광 부자를 떠올려보아도 그렇죠. 탄광과 총을 든 소년병을 떠올리게 되잖아요.
기업이 그 힘을 극대화하여 결국에 사병까지 거느리는 상황, 가끔은 끔찍한 미래의 한 단면처럼 몽상해요.”
“우리나라 기업 조직 문화는 민주적이지도 않으니, 더 답답한 사회가 되는 거겠죠. 하나의 기업이 사실상 국가처럼 기능한다는 것이요.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이 예술을 사랑하고 르네상스 시기의 부흥을 이끌었듯이 긍정적인 기여를 한다면 그나마 나을까요?”
글쎄요, 대개는 기업 자체가 하나의 국가처럼 기능하면서, 철저하게 기업의 이익에 따른 방식으로 가겠죠. 그래도 지배 기업이 자신들에게 친화적인 시장을 만들어가면서도 한 가지는 다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겠어요. 기업이 정부 그 자체가 된다면 아무래도 소비자를 착취의 대상으로만 보지 못할 테니까요. 어떻게든 국가 차원에서 이들의 형편을 안정되게 해야 하죠.
때로는 기업의 이해 관계를 훌쩍 뛰어넘는 결정을 할 수도 있겠죠. 일개 기업으로서 부를 챙기는 일을 넘어서는 역할을 맡아야 하니까요. 국가의 모든 걸 손에 쥔다면, 사우디의 아람코 같은 기업을 언제든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도 무조건적으로 착취를 일삼는 범죄조직처럼 군다면, 결국 밀려난 자들이 반군 세력으로 성장할 것이고요.
어쨌든 여기서는 기업으로부터 세금을 무난하게 걷든 어렵게 걷어내든, 또는 기업이 시민에게 세금을 걷든, 세금을 확보했다고 가정하자고요. 이걸로 국민들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거나, 공공근로 예산을 확보해서 인간 노동자에게 급여를 제공하려고 노력할 수도 있을까요?
현재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선 큰 틀에서 기업 친화적인 정부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노동자의 실업 문제는 체제를 위협하는 수준으로 치닫는다면 정부로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가 되죠. 기업 편을 들 여력이 없어지는 거죠.
정부가 기업의 손을 들어주는 것도 어차피 체제의 순조로운 운영을 위한 것일 테니까요. 그게 위험 수준을 넘어버린다면 당연히 상황을 통제하는 쪽을 택하겠죠.
반대로 정부가 기업을 장악해버린다면 사회주의적인 요소가 많아질 수도 있어요. 기업을 안정적으로 동원해 국가 발전에 필요한 기본 생산을 할 수 있고, 이것으로 창출할 이익을 국민 복지로 쓰겠죠. 충분히 개연성이 있어요.
역사적으로 공산주의 사회도 있었고, 늘 난세엔 영웅적인 독재자가 각광받기도 하니까요.
“어차피 굶어 죽을 바에는 이판사판이지. 우릴 무시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물론 중도적인 성향이 현실에선 많이 발견되죠. 정부에서 시민과 기업을 중재하여 기업에서 일정 부분 노동자를 채용하도록 법안을 제정하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죠. 지금도 하잖아요. 대기업에서 솔선해서 인재를 채용하도록요. AI가 생긴다면 정부의 중재 필요성이 더 높아지겠죠.
기업이라면 공동체의 일원으로 의무를 수행해야 할 거고요. 예를 들어 민간 복지 차원에서 공공근로 제도를 대리 수행하듯이 노동자에게 업무를 주는 방식을 취하겠죠.
예전과 달리 기업으로선 AI와 로봇을 쓰는 편이 효율적이기에, 불필요한 노동력이겠지만요. AI가 미성숙한 수준일 때는 기업으로선 여전히 인간 노동자가 일정 규모 필요하겠지만, 티핑포인트 시기가 무르익을수록 점점 인간 노동자는 잉여에 가까워지죠.
그럼에도 인간을 위한 자리를 만드는 것이 기업에도 또 다른 의미의 이익이 될 수 있어요. 안 그러면 불만 세력이 전 사회에 넘쳐흐르면서 체제가 위협을 받으니까요. 그건 기업으로서도 좋지 않죠.
무엇보다 당장 소비자의 경제 사정이 열악해지면, 물건을 살 사람이 없어지니 시장이 없어지죠. 살 사람이 없는 물건을 AI와 로봇을 통해 찍어내면 뭘 할까요? 겨울에 땔감으로나 쓸 수 있을까요?
원래 노동자에게 월급을 줄 때는 구매력까지도 염두에 둔 것인데, 장기적으로 볼 때 로봇은 유지비가 적게 들더라도 구매력을 지닐 수는 없죠. 기업은 물건만 잔뜩 만들어놓고 도산 위기에 처하고 말겠죠.
“뭐야? 악마라고 욕 먹어가며 탐욕스럽게 돈을 벌려 했더니, 사줄 사람이 다 나자빠졌네.”
예를 들어 식품 회사에서 로봇으로 물건을 잔뜩 생산하더라도, 그걸 사줄 소비자가 없으면 다 소용 없는 일이에요. 로봇을 진정한 시민의 일원으로 대우할 때도 아니니 로봇에게 월급을 주지 않을 것이고, 돈을 주어야 한다면, 그만큼 무인 노동력으로서 매력이 떨어질 테니까요.
되도록 기업은 로봇 운용비를 낮게 유지하기 위해 로봇의 권리 개념이 발달하는 것을 늦추려 할 것이고, 국가에서 매기는 로봇세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겠죠.
만일 로봇 유지비가 너무 높아진다면 굳이 욕 먹으면서 인간의 자리를 파괴할 이유가 없어지죠. 결국 인간에게 일을 시켜 돈을 주어, 소비자로서 인간의 역할을 유지하는 편이 나아요. 사회적 기여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인간은 식품을 사먹으니까요.
기업 입장에선 인간에게 일정 부분 노동 지분을 주어야 할 이유가 생기죠. 그냥 사회적 기부를 통해 시민들에게 기본소득을 주는 방법도 있지만, 그냥 아무 대가 없이 돈을 주어서 그 돈으로 식품을 사먹게 하는 것은 기업 체질상 맞질 않죠.
결국 시민에게도 여전히 노동의 기회가 있는 셈이죠. 시장이 움직이려면 구매력 있는 소비자가 생겨야 하고, 기업은 ‘꽁돈’을 주고 싶지 않을 테니까요.
내 사전에 호구는 없다.
“우리가 이렇게 친할 수도 있었던가요?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소비자인 시민에게 최소한 경제적 비전을 유지하게 해주는 편이 기업에도 장기적으로 긍정적이라는 것에 합의한다면, 시민과 기업이 공존해야 할 타협점을 찾은 것이죠.
기업에서 시민에게 기본 불로소득을 제공하는 유토피아적 상황이라면 더없이 좋겠죠. 그런데 달리 생각해보면 통장에 따박따박 기본소득이 입금되는 것이 유토피아적 상황인가 하는 의심도 들기는 해요. (웃음)
사우디의 석유 재벌처럼 막대한 부를 거머쥔 기업이 등장하고, 너무 돈을 많이 벌어서 정부를 좌지우지 하게 되어 기업 친화적인 독재 국가가 된다고 해도, 그들의 이익 중 일부가 국민에게 돌아가겠죠. 이때 국민이 적을수록 좋을 거예요. 그들은 대학교까지 무상교육을 받는 팔자 좋은 국민이 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정부에서 기업에서 막대한 돈을 거둬들여서 기본소득이 가능하려면, 사회주의적 통제 디자인에 가까워지거나, 독재국가의 체제로 지지를 받는 바람에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을까 싶죠. 부패라든가 인권 문제라든가 하는 것이요. 유토피아론이 온전히 성립하지 못하죠.
“고대 그리스의 착취경제나 근대 제국주의의 식민지경제도 떠올릴 만해요.
고대 그리스의 경우 민주주의를 꽃피웠지만, 여성과 노예를 희생한 착취경제여서 가능했으니까요. 만일 AI가 정의를 외치게 되면 어떨까요?
근대 제국주의 시대엔 식민지를 착취해야 본토의 풍요를 유지할 수 있었죠. 결국 생산한 물품은 어디선가 소비해야 하죠. 생산력이 너무 높아져도 문제는 발생할 거예요. 누군가의 유토피아는 다른 이의 디스토피아를 기반에 두죠.”
물론 이상적으로 모두에게 좋은 상황이 가능하다면 충분한 기본소득을 지급받는 것이 더없이 좋죠. 헬스장 다니고 좋아하는 공연도 보면서, 낮잠도 늘어지게 자고요.
기업에선 AI와 로봇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24시간 가동해서 생산량을 전투적으로 늘리겠죠. AI와 로봇은 힘든 것을 모를 거고, 노동 강도를 두고 부당한 처우로 인지하지 않을 테니까요. 우리로선 약인공지능의 기여 덕분에 혜택을 누릴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