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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원이 Aug 21. 2023

우리 동네(2)

그림 소설

[목차: 우리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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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소개글]
- 삼행시, 놀이글 등을 콜라주 재료로 활용하여 그림 소설로 빌드업했습니다. 
- 콜라주 재로로는 1)녹용을 잘 못 먹어 돌았다는 어느 남자의 이야기 / 2)녹지에 쳐들어와 부적을 쓰더니 / 3)느그 엄마 누고 / 4)빛나는 은갈치와 양지은 의존증 / 5)짜파게티와 뻥튀기 등입니다.
- 이 중에 일부는 브런치스토리에서 공개했습니다.
- 이미지는 모두 고흐의 작품입니다.

- 미신의 흔적만큼이나 낙후된 느낌의 동네. 움직일 수 있다면 어쨌든 돈을 벌어야 하는 다음 달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사회. 숨어 있는 사람들. 가족과 친척들에게 책임이 전가된 복지 구조. 미래라고는 딱히 아름다워 보이지 않던 그곳에서, 아이들은 언젠가 떠날 것을 꿈꾼다. 작중 인물 면지은의 집안 역시 밝지는 못했다. 오히려 남들이 수군거릴 속 시끄러운 가정이었다. 모두가 조금은 방관하면서, 딱히 어쩌지 못하고 살았다. 동네에서.






“야산에 있는 사당에서 오래 전 영혼들을 위로하려 붙여놓은 부적을 어떤 놈들이 개발업자랍시고 모조리 뜯어갔더구먼. 그래서 이런 비극이 일어난 거야.”


이라고 말하곤 하였어요. 그게 참 당혹스럽고 기괴하고 좀 무섭기도 하고 그랬죠. 흥미롭기도 했지만요. 

그런 말을 듣고 나니까 정말 신문에 났다던 그 사건이 동네에서 일어났던 것만 같았어요. 솔직히 저는 옆집 꼬마 아이와 한 반인 아이였다는 소릴 듣기는 했는데, 믿기질 않았거든요.  





→ 나, 면지은


지금에 와서야 돌이켜보면, 어쩌면 그분 돈을 벌어야 했는지도 모르죠. 그때는 정말 사회적 안전 장치가 정말 부족했던 때였잖아요. 지금이라고 해서 더 낫냐고 하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솔직히 그때는 더 심했다는 생각을 하죠. 우리가 무감하게 살아왔고, 예전보다 더 나아졌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사회에 만연한 폭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낭만화할 뿐이지만요.






당시에 가난한 동네는 많았고, 하루 살아 하루 먹는 정도의 가구는 줄어들었다고 해도 여전히 몇 달 동난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난감해지는 사람들이 많았죠. 지금 시절에도 여전히 힘든 사람은 많고 더 나아졌다고 하기도 어렵다지만요. 

사회복지도 그냥 그래서, 정신적으로 어느 정도 건사할 수 있으면, 계속 병을 앓는 상태로도 자기 밥벌이는 해야 했던 거겠죠. 


그럴 때는 손님들도 피했던 것 같은데, 멀쩡할 때는 또 괜찮은 편이고, 동네에 아직 소문이 안 날 때였는지, 아니면 손님들이 이해했던 것인지, 사람을 다치게 한 적도 없고 딱한 사정도 있고 하니, 할머니들이 주로 다니더라고요. 그 집이 실력에 비해서 값이 정말 쌌거든요.

아줌마도 스스로 이상하다 느끼면, 알아서 문을 닫기도 했고요. 






[나, 면지은]
“솔직히 저는 그 장면을 보고 나선 그 집에는 다니지 않았지만요. 무서웠거든요.”






그러고 보니, 녹용을 잘 못 먹어 화가 미쳐 돌았다는 노총각 아저씨도 동네에 살았어요. 습기가 찬 날이면 어김없이 비명을 지르면서 동네를 휘젓고 다녔거든요. 엄마라는 분이 울면서 자식을 따라온다고 하는데, 그 장면을 본 적이 있어요. 한 번요. 그 날카로운 비명과 울음이 귀에 걸려서는 오래도록 씻겨나가지 않는 기분이랄까요. 

마을 전체가 우울하고 비극이 도사리는 것 같았죠. 


“졸업하면 무조건 이 동네 뜬다. 뒤도 안 돌아볼 거야.”






친구의 푸념을 듣고,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지도 못했죠. 

그런데 역시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뭔가 그게 그 집만의 일은 아닌 듯했죠. 이런 말 들어보셨나요? 누구나 비밀이 있듯이, 어느 집안에든 잘 찾아 보면 부자 한 명씩 있고, 동시에 모두가 쉬쉬하는 아픈 친척이 있다고요.


“부자 친척이면 되었지, 아픈 친척은 왜?”






어째서 쉬쉬했는지 모르겠지만, 저마다 그런 것을 집안의 문제로 알았던 것 같아요. 누군가 맡아줄 사람이 없다면 형제나 친척이 역할을 분담했는데, 만일 사회적 지원이 충분했다면 어땠을까 싶죠. 

무슨 비밀도 아니고 저마다 쉬쉬했다는 게 좀 안타까웠죠. 몰랐으면 좋았지만 알고 나면 외면할 수도 없었던, 그런 일도 있기 마련이죠. 


동네마다 미친개 선생님이 있고, 녹용 잘못 먹은 아저씨들이 있고. 바바리맨이라든지 칠공주도 있잖아요. 어떤 존재는 우리 앞에 보였고, 어떤 존재는 소문으로만 들렸죠. 어떤 존재는 있으면서도 없는 것처럼 대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어디나 정신병을 앓는 사람은 생기기 마련인데, 그것을 수용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사회에서나 동네에서나. 하기야 지금은 대놓고 시위를 하죠. 집값 떨어진다고요. (웃음)






저희 집도 예외는 아니었어요. 저희가 그런 시위를 했다는 게 아니라, 모두가 쉬쉬해주는 쪽이었다고 해야 할까요. 제가 어쩌면 우리 동네를 우울하게 기억하는 것도 우리 가족, 우리 아빠 때문이기도 할 거예요. 


“지은아, 술 좀 사올래? 너 진짜 애비 심부름도 안 할 거냐? 못된 녀석!”






아빠는 원양어선 선장이었어요. 참치를 잡으러 나가면 3~6개월씩 안 돌아오곤 했죠. 바다 한복판에서 무엇을 할지 궁금할 때도 있었지만, 사내들의 거친 작업 뒤에는 늘 술이나 도박이 따랐겠죠. 아버지는 주로 술을 즐기는 사람이었어요.

집에 돌아올 때면 긴 휴가를 받는 것인데, 그럴 때면 술을 궤짝으로 들여놓고는 첫 날부터 재회의 기쁨을 뒤로 미뤄두고 술부터 거나하게 마시곤 했어요. 네, 알코올 중독이었죠.


소주는 글라스로 마셔야 제맛이지.






도박을 젊었을 적에 했다고도 하던데 돈을 한두 번 잃고는 곧 흥미를 잃었다고 하더군요. 그런 성격이었던 것은 다행이었죠. 술, 여자, 도박은 세트라는데, 다행히 여자와 도박에는 별 취미를 붙이지 못했던 거고요. 그저 술 타령이었죠. 그냥 술 타령이면 좋을 텐데, 술을 마시면 난폭해지기도 했어요. 말 다툼을 하다가 밥상을 다 엎어버리곤 해서 거실이 엉망이 되곤 하였어요. 


김치 국물이 밴 소파에 앉아서 울던 순간이 어린 시절의 기억 중 유일하고요. 몇 살 때인지는 모르지만, 유리가 다 깨져 있는데, 식탁 위로 옮겨 올려놓고 엄마가 울면서 치우던 기억이 나요. 






소문이 날 수밖에 없었죠. 처음엔 양주를 마시고 돌아다녔는데 그마저 소주와 막걸리로 주종이 바뀐 것으로도 소문이 났죠. 양주를 마시고 다닐 때는 가게에서 행패도 부리고 그랬다는 식이었죠. 그때는 기억에 나는 게 없지만, 소주를 마시던 때는 잘 기억나는 편이죠. 고등학교 때까지니까요. 정말 지긋지긋했어요. 

나도 모르게 비관적이었는지 세상에서 어떤 사건이란 아주 순간적이고 그 갈림길에서 사람의 운명이 180도 달라진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죠.


“죽고 싶다고 죽거나, 죽이고 싶다고 죽인다면 비극은 비로소 객관적으로 완성되죠.”






엄마는 자주 친정에 가 있거나 가출을 해서 시간을 벌기도 했고, 저와 함께 사우나에 숨어 있기도 했어요. 옆 집에 피신해 있기도 했고요. 새벽의 먼 야산에서 들개들이 짖는 소리를 들으면, 어쩐지 처량하다는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죠.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 어떻게든 이런 집에서 떠나고 싶었죠. 졸업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독립할 것이란 다짐을 했었죠. 엄마가 좀 가여워질 거란 생각이 들기는 했지요.






그런 상황인데도 아빠는 어처구니 없게도 가족들이 그렇게 싫어 하는 술주정을 해대고, 난폭하게 굴 때는 정말 지긋지긋하지만, 황당한 주정을 할 때도 있었죠. 뭔가 자기 세계에 갇혀서는 어떤 지점에 머문 것 같았죠. 


“너희 엄마 젊었을 적에 참 예뻤지. 지금도 세상에서 제일 예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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