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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원이 Sep 06. 2023

눈동자(1)

소설

[목차: 눈동자]

겨울

여름

가을

겨울




엄마는 이태째 돌아오지 않았다.




겨울

눈이 흩날렸다. 밤기차가 철로에 몸을 지탱하여 흔들릴 때마다 낮은 조도의 객실 조명이 흔들렸다. 아이는 기차 바퀴가 회전하는 소리에 맞춰 하나에서 열까지 센 후 거꾸로 세었다, 반복했다. 눈은 기차 유리창을 집요하게 두드렸다. 이토록 많은 눈이 내리는 것을 아이는 도시에서 본 적이 없었다. 기차를 타는 것도 처음이었다. 자신이 거대한 철마를 타고 있는 상상을 했다. 말발굽 소리가 날 때마다 숫자로 기합을 하며, 엄마를 태우고 초원을 달렸다. 그것만으로도 눈 내리는 밤기차 여행은 충분히 흥분할 만한 것이었다.

유리창에 비친 사람들의 영상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이는, 유리창을 두드리는 눈 때문이라 생각했다. 엄마의 영상도 흔들리는 사람들처럼 창에 있었다. 엄마의 영상을 두드리는 눈의 색깔이 희미했다. 무채색임에도, 밤에 훼손된 흰 눈은 무채색으로도 온전하지 못했다. 흰 눈 같은 엄마의 얼굴마저 빛을 잃었다. 아이는 찬찬히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넓적다리에 얼굴을 묻었다. 신발을 벗고 의자에 발을 올려놓았다. 몸을 웅크렸다. 엄마는 아이의 움직임에 잠시 눈을 뜨더니, 이내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 그녀의 아랫배가 천천히 부풀어 올랐다가 수축했다. 아이는 다시, 바퀴 회전소리에 맞춰 속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그 셈은 서서히 리듬을 따랐고 엄마의 숨결과 얽혔다. 아이는 엄마의 숨에서 미열을 느꼈다. 숨결과 체온의 규칙적인 자극 속에서 안온했다. 졸린 눈으로 간간히 고개를 들면, 자꾸 뒤로만 멀어지는 시골풍경이 보였다. 산간마을에 조그맣게 빛나던 전기등은 고요에 묻혔다고 쉽사리 잊어선 안 된다고 속삭이는 듯했다. 아이의 들썩임에 잠을 깬 엄마는 그것이 요정의 불빛이라 했고, 아이는 믿었다. 사람들은 깊은 숨을 몰아쉬며 잠들어 있었다. 아이도 서서히 꿈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기차는 역을 건너 역을 넘었다. 역을 다시 건너, 다시 넘었다. 경적 소리로 정적을 찢으며 밤을 뚫었다. 산의 터널은 여러 번 기차를 삼켰다가 뱉었다. 기차는 요정의 세계를 건너고 넘어 어딘가로 느릿느릿 가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 날이 밝아오자, 기차는 조그마한 역사(驛舍)가 있는 허름한 역에 잠시 섰다.

엄마는 아이를 데리고 그 역에 내렸다. 싸늘한 공기가 아이의 볼을 사정없이 때리던 적막한 아침의 역이었다. 먼 곳에 여럿이 사이좋게 들러붙은 산은 떠나가는 기차를 조용히 배웅하는 듯했다. 기차는 멀어졌다. 아이는 기차가 멀어져 가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기차가 보이지 않고도 한참 동안, 철길이 놓인 풍경을 바라봤다.

“인석아! 이제 그만 가야지.”

엄마는 몇 번이나 불러도 꼼짝하지 않는 아이 앞에 쪼그리고는 아이의 어깨를 살포시 잡았다. 어깨에 조그만 책가방을 메어주며, 가자고 동의를 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녀는 양 손에 무거운 짐을 들고, 아이를 다시 불렀다.

역을 벗어났다. 아이는 가끔 멈칫거리며 역을 돌아보곤 했다. 그때마다 엄마는 자신을 제대로 좇아오지 않는 아이가 걱정스러운지 아이를 살폈다. 하지만 아이조차 이해할 수 없는 낯선 먹먹함을 아무리 엄마라도 눈치 채긴 어려웠다. 갇혔다가 풀려난, 해방감과는 분명 달랐다. 해방감이라기보다는 서운함에 가까웠지만 아이는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지극히 섬세하고 규칙적인 것들의 보살핌. 아이는 바퀴의 회전소리와 경적소리, 조명의 흔들림 속에서 그런 것을 느꼈다. 처음 기차를 탄 느낌이었다.

모자는 길을 물어 버스를 탔다. 낡은 버스는 몇 안 되는 손님이 올 때까지 기다렸고, 느릿하게 걸어오는 노인 몇을 더 태운 후에야 천천히 출발했다. 이른 아침 읍내에는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 한둘만이 보였다. 도로를 탄 버스는 속도를 내다가 줄이기를 반복하며 리듬을 탔다. 길에 바짝 붙어 힘겹게 산을 탔다. 산은 눈 위로 긴 흔적을 남기는 것을 허락했다. 그렇게, 산의 고개를 건넜다. 버스를 몰던 아저씨는 겨울 치곤 따뜻한 날씨라고 했다. 하지만 아이가 느끼기에 산을 덮은 겨울은 결코 따뜻하지 않았다.

엄마와 아이는 어느 산의 중턱에 내렸다. 눈 덮인 드넓은 길 위에 남겨졌다. 추위를 심하게 타던 아이는 이미 추위에 질려있었다. 눈으로 뒤덮인 풍경이 낯설었다. 엄마의 두꺼운 코트 속으로 자꾸 몸을 숨기려 했다. 그럴수록 더욱 추웠고, 엄마는 밭은기침을 했다. 아이는 코트로 비집어 들기를 멈추지 않았다. ‘버스아저씨는 거짓말쟁이’라고 마음속으로 열렬히 비난했다. 모자는 입김을 내뱉으며 걸었다. 결코 하나일 수 없지만 한때는 하나였던, 끈끈한 몸의 연대 때문이었을까. 냉혹한 추위는 결코 깊지 않았다. 냉혹한 추위에 단련된 풍경만이 깊었다. 산벼랑 아득히 먼 곳에, 눈덩이가 날카로운 나뭇가지에 꽂혀있었다. 곧 잘릴 것만 같이 위태로운 눈 저 편에 산장 하나 보였다. 아이의 외숙부 집이었다.

“여기서 외할머니, 외삼촌 말 잘 듣고 있으면 엄마 금방 돌아올 거야. 알았지?”

엄마는 외숙부의 산장 앞에서 아이에게 말했다. 그녀는 아이의 손을 꼭 잡았다. 아이는 손이 얼얼했지만, 평소처럼 투정부리기에는 엄마의 눈빛이 너무 슬퍼 보인다고 느꼈다.

“엄마는 어디 갈 거야?”

물론 슬픔을 느꼈다고 해서 그 슬픔에 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을 만큼 조숙하진 않았다. 천진하게 물으며, 사방에 쌓인 눈에 시선을 두었고 겨울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엄마는 아이에게 웃어 보였다.

“엄만 잠시 미국 갔다 올 거야. 가까운 곳이니까, 금방 올게.”

아이는 미국이 기차가 잠시 서는 역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다. 미국역. 적막한 아침의 역에서 조금 더 가면 있을 것 같았다. 엄마가 며칠 후 돌아올 줄 알았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겁이 나긴 했지만, 산장에는 외할머니가 있었다. 외숙부와 외숙모도 있었다.

“외숙모 말 잘 들어야 해.”

엄마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그 말을 하면서 자꾸 눈물을 훔쳤다. 눈자위가 벌겋게 충혈되었다. 검푸르던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옅어졌다. 그 안에서 아이가 울었다. 외숙부는 엄마의 짐을 들고 있었고, 외할머니는 아이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외숙모도 고개를 숙이고 마당에 서 있었다. 엄마는 쪼그린 채 아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지만 그뿐이었다. 밭은기침이 더 심해졌고, 입술은 심하게 부르터있었다. 아이에게 끝내 입맞춤하지 않고 자신의 짐만을 들고 떠났다.

희미해져가는 엄마의 뒷모습이 유려한 산의 곡선 위에서 출렁였다. 생눈판을 걸어가는 그녀의 홀몸이 뉘엿뉘엿 산의 언덕 아래로 숨을 때, 아이는 자신의 눈동자에 걸린 흑백사진을 절대 잃어버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툭, 떨어진 눈덩이가 치열하게 뻗은 가지에 잘렸고, 아이의 가슴이 아렸다. 아이는 문득, 미국역이 훨씬 더 멀 것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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