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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원이 Sep 06. 2023

눈동자(2)

소설

[목차: 눈동자]

겨울

여름

가을

겨울





“밥을 잘 먹어야, 엄마가 빨리 온다.”

아이는 외할머니의 말을 그대로 믿고 싶었다. 특히 외숙모가 미역국을 끓여주면, 반드시 깨끗이 먹었다. 단어의 연관성을 잘 모르던 아이는 ‘미역국’을 먹으면 ‘미국역’이 가까워질 거라는 막연한 믿음을 홀로 지어냈던 것이다. 일종의, 기도였다.

외숙부는 엄마가 아름다운 나라로 갔다고 했다. 미국은 너무나 드넓어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곳이라 했다. 그는 거실소파에서 아이에게 무릎의자를 해주곤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간혹 텔레비전에서 백인이나 흑인이 나오면 “저 사람들이 사는 동네란다.”라고 운을 뗀 뒤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아이는 흑인과 백인이 사는 허름하고 아주 큰 역을 상상해보았지만, 아름다운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그보다 아이에겐 거실에 놓인 흑백텔레비전이 인상적이었다. 도시의 텔레비전은 늘 쇼윈도 건너편에 놓여있었다. 그래서 처음엔 텔레비전을 켜는 방법을 몰라 한참 망설였다. 브라운관에 비친 아이의 모습은 브라운관의 곡면을 따라 넓게 퍼졌다. 거울에 비친 모습보다 훨씬 못난 얼굴이 방그레 웃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엄마가 사는 마을을 볼 수 없었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텔레비전은 거울로도 쓸 수 없는 애물단지였다.

“미국도 텔레비전에 다 들어가요?”

“미국은 너무 커서 텔레비전에 다 들어가지 않아.”

외숙부는 엄마가 사는 곳이 우리가 있는 곳과 가장 가까운 쪽인데 불행히도 그 쪽까지는 텔레비전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마다 밭은기침을 했다. 평소답지 않게 이야기는 자주 끊겼다.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기다리는 순간에, 늘 그는 일을 해야 한다며 2층 서재로 올라가버리곤 했다. 외숙부의 서재는 현수 방 맞은편에 있었다. 소설가였던 (아무도 그를 모르고 그의 책도 찾아볼 수 없는 걸 보면 소설가 지망생이었을 수도 있는) 외숙부는 밥 먹거나 읍내에 나가는 때를 제외하곤, 하루 대부분 서재에서 지냈다. 아이는 그가 무엇을 하는 건지 잘 몰랐다. 글을 쓴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런 일을 하는 까닭을 이해하지 못했다. 외숙부는 늘 지쳐 보였기 때문이다.

아이는 그저, 서재에 책이 빼곡히 꽂힌 게 신기했다, 외숙부가 엄청난 부자라고 생각했다. 천장에 닿을 듯한 책꽂이는 위압감을 주었지만 아이는 이내 익숙해졌다, 눈을 감았다, 종이냄새를 느꼈다. 냄새는 섬세하게 코를 비집고 들어 가슴에 잔무늬 새겼다. 외숙부의 흰 종이에서는 늘 잉크냄새가 났다. 잉크의 잔향(殘香)은 아이의 코끝에 검은 자국을 남길 듯 생생했다. 마음의 잔무늬 잎맥으로 흘러 든 외숙부의 냄새가 검게 굳었다. 타액 같이 어색했지만 역시 익숙해졌다. 수많은 책들도 오래되어 희미한 잉크냄새 뿜었다. 색이 바랜 바람[望] 냄새 은은하게 흩날렸다. 때때로 흔들리는 나뭇잎 같았다. 바람에 휘둘려 늘 불안정하지만 가지에 붙어있기 위해 애쓰는 단풍잎이거나 날카로운 침을 품은 침엽이었다. 외숙부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외숙모는 그가 서재에 올라가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외숙모가 참지 못하고 타박하면 외숙부는 마지못해 펜을 놓고 1층으로 내려갔다. 그러면 2층은 아이의 차지였다. 아이보다 두 살 많은 현수는 읍내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주중에는 읍내에 사는 인척 집에서 하숙을 했고, 주말에나 산장에 왔다, 2층은 자주 비었다. 외사촌 현수 방을 쓰는 아이는 서재에서 현수 방까지 빠르게 왕복하는 것을 놀이로 즐겼다. 서재는 외숙부, 텔레비전은 외숙모나 외할머니 차지여서 아이는 대개 2층이나 밖에서 놀았다.

날이 점점 풀렸다. 마당에는 군데군데 얼룩처럼 눈물[雪水]이 고였다. 산봉우리에 걸려있던 겨울은 봄잠을 자기 위해 땅으로 숨어들었다. 눈석임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새싹이 자라났다. 바람이 선들거렸고 산들거렸다. 날씨가 마음을 풀어주는, 잔풀나기 한창인 봄이었다. 남실바람이 날릴 즈음 외숙부는 가끔 아이를 데리고 읍내에 나갔다. 읍내는 텔레비전에서 비치는 모습보다 빈천해 보였다. 허술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나마 활력이 넘치는 읍내는 아이에게 신나는 곳이었다. 그는 읍내로 가면 우선 책을 한아름 샀다. 그럴 때 꼭 동화책 두 권을 사서 아이와 현수에게 선물했다. 아이가 읍내에 나갈 때마다 현수는 링거주사를 맞고 있었다. 몸이 많이 야위었고 아이보다 작았다. 늘 아파 집에 오더라도 침대에 누워 있곤 했다. 자주 쓰러졌고, 주말에도 산장으로 돌아오지 못하곤 했다. 외숙부와 함께 현수를 만나고 나면, 아이에겐 동화책이 한 권씩 생겼다. 외숙부는 현수에게 들른 후엔 반드시 장을 보았다. 장을 보면서 외할머니가 좋아하는 뻥과자를 반드시 챙겼다. 할머니는 그것을 구석에 두었다가 현수나 아이가 방에 들를 때마다 내어 주었다. 뻥과자는 늘 아이와 현수의 차지였다.

외숙부는 아이에게 군것질거리도 사주고 영화를 보여주기도 했다. 도시에 있을 때부터 영화관은 뭐 하는 곳일까 궁금했지만, 엄마는 늘 바빴고 아이 혼자 시내를 다니기엔 너무 어렸다. 그래서 시골영화관에서 보는 철 지난 영화였지만 아이에겐 아주 훌륭했다. 아이는 텔레비전 화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스크린에 압도됐다. 커다란 화면 속에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아이는 자신과 다르게 생긴 사람들이 총을 쏘며 사막을 누비는 모습에 마냥 설렜다. 영화화면에 미국을 다 담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 틈만 나면 영화를 보자고 외숙부를 졸랐다. 스피커에서 터져 나오는 큰 소리나 웅장한 화면에 놀란 아이의 울음, 짭조름한 팝콘 톡 쏘는 콜라의 맛도 아이를 즐겁게 자극했다.

아이는 죽은 사내를 커다란 화면에서 보기 전까지는 영화관에 자주 갔다. 봉머리에 낮달이 걸린 날, 영화화면 속 남자의 흑백 몸에선 구더기가 끓었다. 주름진 흰 밥알들이 살아서 꿈틀대는 것만 같았다. 아이는 구더기가 자신의 몸에 기어올라 떨어지지 않을 듯해 소름 끼쳤다. 그때 사내의 치켜 뜬 흰 자가 클로즈업 되었다. 눈동자가 있어야 할 자리까지 오로지 흰자로만 덮여 있었다. 아이는 혼란스러웠다. 흰 바탕색으로 가득 채운다면 더 아름다울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지만, 눈동자가 없는 눈이 전연 아름답지 않다는 걸 발견한 것이다.

“눈동자가 없어요!”

울면서 소리치고 말았다. 아이를 영화관에서 업고 나온 외숙부는 웃으면서 달래주었다.

“인석아, 사람의 눈동자는 영혼이란다. 죽으면 영혼은 하늘나라로 떠나잖니. 그러니 당연히 눈에는 눈동자가 없는 거야. 잊어라.”

그러나 아이는 남자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사막 한복판에 놓인 시체의 그림자가 흰 눈과 강렬하게 대비되었다. 눈동자가 열기에 녹아 흘러내린 것 같다고 느꼈다. 끔찍했다, 영화를 보자고 외숙부에게 다시는 조르지 않았다. 엄마의 죽은 모습을 화면으로 볼까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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