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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원이 Sep 07. 2023

눈동자(4)

소설

[목차: 눈동자]

겨울

여름

가을

겨울





가을

단풍 색깔이 산을 덮기 시작했다. 색깔이 여물어 가장 깊은 향을 퍼뜨렸다. 산은, 붉은 낙엽을 바람에 흘려 보내기 전까지 신열이 나는 단풍잎을 옹골지게 머금었다. 겨울에 죽임 당하지 않기 위해 색깔 태웠다. 곧 깊은 색깔 품에서 스스로 생명의 끝자락을 놓을 것이다. 복잡하지 않았고 나약하지 않았다. 그 위에서 그림자들은 뜨거워졌다. 밤이 깊어지고 길어지자, 그림자들은 밤의 투쟁을 격렬히 벌였다. 달을 견제하려 하였다. 더 깊은 밤을 향한 욕구가 그들에게 있었다. 그렇게 수없는 세월이 지나면서도 그림자들은 달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달을 먹으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월식으로 인한 승리의 기쁨은 늘 잠깐 동안이었다. 결국은 반역의 그림자 무리들은 패배를 반복했다, 겨울 밤을 기다리며 가을 밤 속에 갇히는 형벌을 받았다.

그나마 안개 낀 으슴푸레한 달밤이면 그림자들은 달빛의 통제에서 잠시 벗어났다. 메숲의 그림자들이 심술궂은 장난을 치는 때였다. 그림자들은 산장의 외벽에 들러붙어 기어 다녔다. 키득거리며 메아리치는 듯한 소리 반복했고, 산짐승들의 소리를 기괴하게 흉내 냈다. 마당에 모여 현관의 조명등을 자신들의 몸으로 가리기도 했다. 그때마다 반드시, 사나운 들개가 나타났다. 들개는 메숲의 그림자를 경계했다. 그것들이 산장을 탐하거나 무덤가에서 어슬렁거리면 어김없이 날카로운 송곳니 드러냈다. 그림자들은 가끔, 떼로 도전했다. 들개는 홀로 대적했다. 피로 엉겨 붙은 털과 피부병으로 군데군데 드러난 살. 흉한 몰골로도 절대 지치지 않았다. 산장과 무덤을 지켜내려는 맹목적인 움직임은 공격적인 울음을 낳았다. 몰래 지켜보던 아이는 들개가 달을 자극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아이는 조마조마한 것이 낫다고 여겼다. 그림자들이 들개와 싸우지 않을 때면 아이에게도 가끔 장난을 쳤기 때문이다.

‘내일 밤에 네 엄마 죽어.’

이불을 뒤집어 쓴 아이에게 속삭이곤 했다. 그 소리는 평화로운 새벽의 물결처럼 퍼져 고막에 부딪혀 메밀꽃 일었다. 고막을 울리고 아이를 울렸다. 아이는 ‘내일 밤이 오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 그때마다 그림자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 들렸고 아이는 늘 현수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림자는 “내 동생 못 살게 굴지 마!”라고 외쳤다. 아이는 현수가 아이를 보살피기 위해 밤하늘에 숨어산다고 믿었다.

“현수형을 봤어요.”

“꿈을 꾼 모양이구나.”

외숙부는 아이를 무릎에 앉히며 말했다.

“아니에요. 정말로 현수형의 눈동자 색깔이었어요.”

아이는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영혼이 제가끔 달라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색깔의 눈동자가 돼. 그래서 비슷한 검정색이라도 아무 눈동자로 바꿀 수 없는 것이지. 하지만 그 눈동자들은 때가 되면 하늘나라로 올라간단다. 하늘나라가 뭐라고 생각하니?”

아무래도 눈동자는 하늘나라에 올라가는 것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며, 검지를 펴 동그라미를 그렸다.

“넌 색과 형태에 민감하구나. 그림을 그리면 좋겠다.”

외숙부는 현수에게 자주 하던 말을 내뱉었다. 아이는 그를 올려다보았고, 그의 눈동자에서 현수의 색깔을 느꼈다. 다시 보았다. 현수의 그림자는 아니었다. 잠시 스쳐간 것일까, 아니면 다른 것이었을까? 아이는 알 수 없었다. 그만큼 현수의 색깔이 생생하게 그의 눈동자에 스몄었다. 외숙부는 기침을 했다. 피를 쏟았다. 아이를 내려놓고 손바닥에 묻은 피를 닦았다. 잘 닦이지 않았다. 그의 손바닥에 장미꽃이 날카롭게 새겨진 듯했다. 그것의 가시가 목구멍에 걸렸는지 그는 자꾸만 기침을 해댔다. 그의 얼굴은 뭐든 써 내려갈 수 있을 새하얀 종이 같았다. 외숙부는 점점 엄마를 닮아갔다. 할머니도 그랬다.

늦가을 비가 멈추던 날, 지붕 슬레이트 판을 타고 떨어지던 빗물이 눈물처럼 짰다. 그 날 저녁 바람이 을씨년스럽게 속삭였고, 그림자는 산의 숨결을 타고 사뿐히 날아올랐다. 연처럼 바람에 몸을 맡긴 할머니의 그림자.

“할머니!”

흑빛 매끄러운 밤바다 같은 그림자에 비친 아이가 새파랗게 놀란 채 울고 있었다. 그림자는 너무도 맑은 거울이었다, 달에 먹혔다. 달은 아이의 비명에 놀랐는지 사래 걸린 듯, 급하게 밤을 토해냈다. 할머니의 그림자를 삼킨 달이 예전보다 더 짙은 밤을 토해냈다, 할머니는 밤이 되었다. 그녀는 밤바람을 타고 세상으로 퍼졌다. 달이, 밤하늘에 홀로 박혔다. 청아한 달빛은 할머니의 색깔을 제대로 느끼는 데 방해가 되었다. 아이는 달이 할머니의 원수라 생각했다, 언젠가 달을 밤하늘에서 떼어버릴 것이라 다짐했다.

하지만 달이 살고자 하는 의지를 막을 순 없었다. 그것은 본능이었다. 그림자들도 본능대로 움직이긴 마찬가지였다. 자신과 가장 비슷한 밤의 여백을 자신의 색깔로 충실히 채웠다. 외숙모의 눈동자 여백에 숨어사는 들개의 그림자도 이런 이치에 순응하는 것일 뿐이었다. 물론 아이가 그 이치를 깨닫기엔 너무 어렸다. 아이는 그저 밤을 타고 놀러 오는 현수의 그림자를 반겼고, 달의 교만이 싫었다. 그림자의 방문에 맞추어 창문을 열고 커튼을 쳤다. 그러면 아이는 모든 곳을 채우고 있는 할머니의 색깔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하는 이들과 영원히 함께 하게 해주세요.’

아이는 기도했다.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원망했다. 아이가 보기에, 달은 어떤 것도 베풀어 줄 것 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다시 기도해야만 했다. 그것밖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달빛이 드는 자리를 피해 앉거나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 버릇이 생겼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떠나갈수록 밤은 더욱 튼실히 깊어졌다.

할머니가 밤이 된 후로, 숙모의 눈동자엔 들개의 그림자가 더 자주 들어왔다. 밤마다 들개의 울음이 산장을 메웠다. 들개는 뚜렷한 형상을 지닌 채 2층에 올라오는 경우가 많았다. 붉은 송곳니 드러낸 채 어슬렁거렸다. 현수의 침대에 누운 아이를 바라보는 들개의 눈빛은 공허한 공격성을 띠었다. 아이는 그것이 자신을 해하지 않을 것이란 걸 직감적으로 알아챘지만, 여전히 두려웠다. 꼼짝 못하는 아이를 한참 바라볼 때면 들개의 눈동자 깊숙한 여백에 외숙모의 그림자가 있었다. 입에 물린 울음이 침을 타고 마룻바닥에 떨어져 울렸다. 송곳니에 맺힌 붉은 선혈도 2층에 진한 흔적을 남겼다. 응고된 피의 색깔엔 외숙부가 토한 피의 잔흔도 섞여있었다. 외숙부는 서재보다 침실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아이는 현수의 방보다 서재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서재에 있을 땐 들개도 조용했다. 아이는 안락했다. 오줌이 마려운 경우엔 참기 어려웠지만, 대개 그럭저럭 지낼만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책 냄새는 수많은 이야기를 아이에게 들려주었다. 책벌레의 느릿한 움직임을 천천히 지켜보며 행간에 시선 찌르면, 활자들은 깜짝 놀라 더욱 검은 피 흘렸다. 알알이 박힌 활자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아름다운 삶에 관해 노래 불렀다.

아이는 간혹 외숙부의 소설도 읽었다. 외숙부의 원고지가 책상에 올려져 있을 때면 아이의 시선은 휘갈겨 쓰인 그의 글자를 느릿느릿 좇았다. 이야기가 기억나지 않는 소설이었다. 인물도 기억나지 않는 소설이었다. 하지만 그의 소설에서 문장만큼은 검은 코트를 입고 돌개바람으로 휘몰아쳤다. 밤바람이 차가워졌다. 암청색 밤하늘 위에서 요요하게 휘감기는 달빛이 글자의 궤적을 훑었다. 글자들은 추웠다, 행간의 숲으로 숨어들어가 그림자가 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밤으로 위장하지 않은 흰 종이에 제 몸들을 온전히 드러내고는 다양한 방향으로 획을 뻗었다. 외숙부의 획이 달빛과 정면승부하고 있었다. 길눈에 빠져 허우적대던, 글자들이 제가끔 일어서 달을 향해 획을 쏘았다. 조용한 전투였다. 달의 피가 밤이 되어 흘렀다. 글자들이 다치기도 했다. 차가운 달빛에 생눈판으로 변한 흰 종이에서 검은 피 냄새 풍겼다. 활자가 되지 못한 글자는 활활 타고 남은 재처럼 생명력을 잃었다. 아이는, 불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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