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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원이 Sep 08. 2023

눈동자(5)

소설

[목차: 눈동자]

겨울

여름

가을

겨울





겨울

한동안 눈이 내렸다. 수북이 쌓인 눈이 아이의 키를 훌쩍 넘어서고도 쉬지 않고 내렸다. 눈이 밤마다 달빛을 반사하여 영롱한 빛을 뱉었다. 저건 요정의 불빛이란다, 엄마는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추위는 점점 깊어졌다.

외숙부의 기침소리도 점점 깊어졌다. 1층 침실에서 올라오는 잔향(殘響)이 아이의 발바닥을 살짝 두드렸다. 서재에서 책을 읽을 때면 아이는 밤마다 들리는 그의 기침소리에 박자를 맞추었다. 길고 잦은 기침 사이에 짧은 정적이 놓였다. 들개는 그의 피를 핥아주고 있을 것이었다. 짧은 정적이 잦아질수록 들개의 붉은 송곳니에 엉겨 붙은 혈흔의 색깔도 깊어졌다. 들개의 울음도 더욱 붉어졌다.

차가운 눈은 단단한 얼음판이 되었다. 추위는 칼바람을 타고 경박해졌다, 외숙부는 심하게 앓았다. 아이는 낮달처럼 떠버린 그의 얼굴을 보고 영화화면 속 죽은 사내를 떠올렸다. 겁이 났다. 언제나, 떠나 보내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다. 울었다. 외숙부는 웃으며 아이의 손을 잡아주었다. 금방 나아서 같이 놀자고 몇 번이고 아이에게 약속했지만, 아이는 믿기 어려웠다. 할머니가 어긴 약속이 자꾸 생각났다. 의사가 산장을 찾으면, 늘 아이를 내보낸 후에야 진찰을 했고 아이는 아무 말도 엿들을 수 없었다. 문 앞에서, 웅얼거리는 말의 찌꺼기라도 건지려 했지만 아이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이야기였다. 그 세계는 너무도 춥고 어두운 것처럼 느껴졌다. 겨울 해는 얕았고 밤은 너무 깊었다. 하지만 냉혹한 달빛은 결코 깊지 않았다. 그것은 심술궂게도 그림자들을 밤에서 자꾸 덜어내었다. 그림자들은 밤을 살기 위해 달을 닮아야 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서로를 믿지 않아야 했다. 짓궂은 장난조차 칠 여유 없는, 한겨울이었다.

외숙부가 겨울밤으로 여행을 떠나던 날, 들개는 2층과 1층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유난스럽게 으르렁거렸다. 아이는 평소보다 숨죽였다. 외숙부의 기침소리는 절정에 올랐다. 짧은 정적이 한없이 길어지더니 끝내 기침소리가 다시 들리지 않았다. 아이는 바닥에 귀를 대고, 킁킁거리며 피를 핥아주고 있을 들개를 상상했다. 그때 아이 옆에서 같은 자세를 흉내 내는 그림자가 보였다. 현수의 그림자였다.

“난 이제 가봐야 해.”

들개의 긴 울음이 들렸다. 다양한 방향으로 날아간, 붉은 울음의 촉이 밤하늘과 달에 꽂혔다. 그 엄격하고 표독스러웠던 울음이 심하게 굴절됐다, 울렸다. 울음의 힘에 밤이 살짝 흔들렸다. 밤하늘에 걸린 달도 놀라 예리한 달빛으로 하늘을 찔렀다. 당황한 그림자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창백한 눈벌판에 검은 그림자 알알이 박혔다. 얼음벽에 매달린 채 다시 어둠에 몸을 숨기려던 그림자들은 달빛에 꽂혔다, 달에 먹혔다. 메숲의 그림자들은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림자들은 달에 먹히지 않기 위해 서로의 자리를 빼앗고 빼앗겼다.

밤이 심하게 꿈틀거렸다, 서재의 창문이 활짝 열렸다. 현수의 그림자는 일어나서 창가로 갔다. 웃었다. 사뿐히 날아올랐다. 아이는 현수의 그림자가 산 너머로 사라져 더는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쪽을 바라보았다. 끝났다 생각했다.

그때 책상에 놓인 흰 종이에서 글자가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잉크냄새 피우며 글자들이 뭉쳤다, 사람의 윤곽을 보였다. 그림자였다.

“삼촌!”

그림자는 창밖으로 빠져나가려다가 아이를 되돌아봤다.

“어떻게, 알았니?”

아이는 적당한 대답을 찾기 어려웠다. 머뭇거리면서도 그림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날아가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냥, 색깔이 삼촌이에요.”

그림자에서 잉크냄새가 진하게 배어 나왔다. 외숙부의 그림자는 아이에게 다가가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비록 잠깐 동안이었지만, 아이는 눈물을 훔쳤다.

“울지 마, 이 녀석아. 자꾸 눈물을 보이면 눈동자가 닳아버릴 수도 있어.”

아이는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외숙부의 그림자는 다시 창가로 갔다.

“밤바람 차니, 창문 꼭 닫아라.”

그의 그림자는 현수의 그림자를 좇았다. 아이는 창가에서 그의 그림자가 날아가는 방향을 바라봤다. 마당에서 들개도 그 방향을 향해 아주 길고도 아픈 울음을 쏘아 올렸다. 세찬 달빛이 들개의 몸뚱어리를 꿰뚫었다. 한겨울 밤 붉은 장미 넝쿨이 들개의 몸에서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달빛을 감고 달까지 자랐다. 달을 관통했다. 붉은 울음이 장미 넝쿨을 타고 올라 달에 번졌다, 달이 취했다. 들개의 눈동자에서 외숙모의 그림자가 쏟아져 나왔다. 외숙부의 그림자를 좇았다.

외숙부의 그림자가 지날 때마다 그 근처에 있던 그림자들의 색깔이 더욱 까매졌다. 깊은 밤의 여백을 튼실히 채우고 있으니 자신의 자리는 노리지 말라는 의미를 지닌, 경계의 색깔이었다. 그림자의 무리를 헤치고 외숙부의 그림자가 지나갔다, 곧 외숙모의 그림자도 지나갔다. 들개의 울음은 그들의 행로를 다른 그림자가 방해하지 못하도록 호위했다. 외숙부모의 그림자가 산의 곡선 아래로 뉘엿뉘엿 사라질 때, 아이는 자신의 눈동자에 걸린 흑백사진을 절대 잃어버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림자들은 잠깐 동안의 혼란을 수습하고 다시 밤의 여백으로 몸을 숨겼다. 흰 눈만이 산을 덮고 있었다.

아이는 눈동자를 잃은 얼굴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눈물은 꾹, 참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자꾸 눈물이 흘렀다. 팔뚝으로 눈물을 훔쳤다, 검은 잉크가 팔뚝에 번졌다.

“엄마…….” 말을 신음처럼 흘렸다.

아이는 외숙부의 말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그러나 자꾸 가슴이 뛰었다. 숨이, 찼다. 피가 빨리 돌면서 손가락 끝을 때렸다, 손가락 끝이 아렸다. 손가락 끝에 땀처럼 검은 잉크가 맺혔다. 잉크가 흐르는 손으로 달을 가렸다. 팔뚝으로 잉크가 흘러내렸다. 아이는 눈을 감고 밤의 색깔을 느끼려 했다. 곧 아이의 몸은 잉크로 흠뻑 젖었다. 고개를 돌리자 책상이 보였다. 한참 동안, 휑한 듯, 빈 종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외숙부가 채웠을 궤적을 따라 눈동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엄마는 이태 후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빈 집에 홀로 남았다, 아주 오랫동안,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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