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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원이 Sep 30. 2023

이곳에서 찍은 사진 한 장 동봉합니다

소설

[소개글]
- 삼행시, 놀이글 등을 콜라주 재료로 활용하여 그림 소설로 빌드업했습니다.
- 이미지는 모두 고흐의 작품입니다.
- 콜라주 재로로는 1)[삼행시]전력을 다하여 삶을 사랑한다니 / 2)[삼행시]원서 읽기와 번역기 돌리기 / 3)[놀이글]희미했던 그 순간이 조금은 맑아지고, 잠자코 등입니다.

 





“전력을 다하여 삶을 사랑한다니, 그건 지치는 일 같았죠. 하지만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합니다. 때때로 그리운 당신의 얼굴처럼.”


 하- 자 없던 삶이 그립다며

 얼- 굴이 반듯한 시절을 떠올리려 했다.

 빈- 궁한 것이 무슨 죄겠느냐마는


 전- 력을 다하여 사는 곳에서는 다 갖춘 것으로도 모자라,

 여- 분의 것이라도 착실히 쟁여놓질 않으면

 빈- 속에 소주를 들이붓는 것 같아 두려웠다.






무언가 비어있는 것을 좋아하죠. 그때와는 다르게요. 저녁의 빈 하늘에 잠깐 채워지는 노을도 사라지는 것이라 아름답다고 생각하거든요.

이곳의 풍경에는 있을 게 있어요. 해는 해인 채로, 산은 산인 채로, 들판은 들판인 채로, 그저 있지요. 그 안에 마을은 마을대로 있고, 전봇대와 전깃줄과 담장과 밭이 있고요. 

먼 타지에 와서 생활할 것을 결심한 것도 조금은 조용하고 희미한 삶을 원했기 때문이니까요. 





→ 나, 잔여빈


나로서 의무가 너무 많은 것을 부담스러워 했었죠. 하지만 이곳이라고 호락호락할 리는 없었죠. 

말이 통하지 않고 배운 것도 여기서는 적용하기 쉽지 않더군요. 어디든 완벽하게 딱 좋은 곳은 없으니까요. 하나를 희생하고도 충분히 있어야 할 가치가 있다면 그곳을 선택하는 것뿐이잖아요. 






얼마 전에 도심에 나갔다가 책을 한 권 샀어요. 이곳에서 한참 잘 나가는 순수문학 작가라더군요. 당연히 제가 알 수 없는 문장이 가득했죠. 그 말의 무덤 앞에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무력감은 오히려 홀가분함 같은 것이더군요. 그 정도로 무지해지는 기분도 기억에는 없으니까요. 






하나씩 타자를 쳐서 번역기를 돌려보았지요. 텍스트를 번역기를 돌려가며 영문으로 바꾸고, 그걸 다시 한국어로 바꾸어서 해독하곤 하였지요. 번거로운 만큼 시간을 어쩔 수 없이 들여야 했고, 그만큼 읽기는 느려지더군요. 

그런데 한국어 번역기를 돌려보지만, 알잖아요. 순엉터리라는 걸요. 특히 문학책이라면 더더욱 그렇지요. 현지어를 가르쳐줄 한국인이 많지 않았어요. 선교사님과는 일주일에 한 번 만날 수 있었고요.


“기도도 해야 했어요. 선교사님 만나면. 저는 어린 양이 되어야 했지요.”






혼자 있을 때 서툴더라도, 간간히 한 문장씩 읽어요. 잘 안 읽혀서 자주 책을 덮지만, 울적할 때면 가끔 읽어요. 

그러다 보면 한 페이지씩 넘어가고 있더군요. 노를 뺀 쪽배라 만지작만지작 뱅뱅 돌면서도요. 






그대는 잘 있나요?

어제 우체부가 왔다가 집에 아무도 없어서 다시 들고 갔다던 소포를 이제야 챙겼어요. 당신의 이름을 듣고 읍내에 나간 김에 제일 먼저 우체국에 들렀답니다. 하얼빈에서 온 소포에는 오래 전 일지가 들어 있더군요. 언제 찍었는지 가물가물한 여자의 사진도 한 장 있더군요. (웃음) 제가 비교적 어릴 때의 사진이었어요. 그걸 지금까지 챙겨놓고 있었더군요.






기억나지 않는 어떤 순간을 들추려는 무의식이 요동치는 것 같았어요. 그것은 어쩌면 조금은 두렵고 조금은 외로우며 조금은 자신이 끈질기게 늘어붙어 버티던, 그리하여 어찌했든 자신이고자 했던, 어떤 황량한 순간이었다고 해야 할까요? 그때 저는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을까요? 볼 때마다 바뀌는 그 표정을 자신조차 알 길이 없지만요. 





→ 나, 잔여빈


어쩌면 그 애매한 기억의 그림자를 되짚어보려다 보니, 어쩐지 지금의 사진도 한 장 찍고 싶어지더군요. 그때도 지금만큼 그럭저럭 괜찮았을지도 몰라요. 그때는 무엇이 그리 힘들었는지 지금은 희미하죠. 

지금 찍은 이 사진을 보고도 지금 하는 말을 훗날 하게 될까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되짚으면서요. (웃음) 이곳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동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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