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희정 & 천재론2
[목차: 천재론]
◑ 1부. 부자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 천재를 유형별로 분류하는 세 가지 방식
♬ 천재는 홀로 태어나는가?
♬ 자본주의와 천재
◑ 2부. 창의적 도전과 보상 체계
♬ 인정 욕구와 눈치 보기
♬ 정당한 보상과 문화적 토양
♬ 천재의 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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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희정: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타 있는
굳이 어느 쪽이 더 강력하고 압박적인가 하면 사회겠죠. 사회는 모든 천재뿐 아니라 수많은 지성과 사회인의 지혜가 담긴 집적물일 수도 있으니까요. 적어도 그러한 현명한 지혜가 반영되지 않더라도 파편처럼 흩어진 예술 작품, 책, 논문 등등 다양한 양식으로 그 성과가 기록되어서 전승되고 있어요. 현대에 와서 체계적이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한 지식 성과를 보면 100년 동안 이룬 것이 그동안 인류가 이루었던 성과를 뛰어넘는다고도 하죠. 그만큼 하늘 아래 새로울 것이 없어질 만큼 확률적으로 촘촘하게 아이디어의 가능성이 실현되었거나 실패했거나 유보된 채로 끈질기게 기록되어 있어요.
그래서 현대에는 뭘 하나를 하려고 해도 방대한 정보망에 걸리죠. 심지어 21세기에는 인터넷을 통한 검색마저 용이해서 수용자마저 만만찮은 정보력을 보여주죠. 정보 엘리트층에서 뭔가를 수용자 몰래 도모하기도 어려워질 만큼요. 예를 들어 과거에는 다른 나라에서 유행하는 프로그램을 표절해서 자기 나라에서 인기 작품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젠 유튜브 등으로 쉽게 알아채니까요. 해외에서 알아서 제보해주기도 하죠.
각자의 분야에서도 관련 정보망이 촘촘하다 보니, 처음에는 새로운 아이디어인 줄 알았다가도 금세 낡은 개념이란 걸 깨닫고 말죠. 뉴튼조차 근대에 자신이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타 있다’라고 했으니, 우리가 얼마나 많은 거장들의 지적 자산 위에 서 있는지를 새삼 깨닫죠. 그래서 300년 동안 발전했던 서양 클래식은 현대에 이르러서는 정체되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이러한 지적 자산도 결국 포화상태에 이르면 더는 아이디어의 조합이 새로울 것이 없어지니까요.
운이 좋아 영화나 재즈의 탄생처럼 혁신적인 창조적 사건이 벌어지더라도, 사고 습관의 유사성 때문인지, 과거에 유사한 장르의 아이디어 파생 방식이 비슷하고도 빠르고 정교하게 응용되기 마련이에요. 그러면 급속도로 아이디어가 포화되어 한계에 봉착하는 시점이 앞당겨지죠. 재즈도 그렇고 록도 그랬다고 생각해요. 생산능력이 엄청난 자본주의 사회에서 금세 집중하여 포화되는데, 개인들이 발표하는 창작 채널마저 보장되니 다양한 아이디어가 세상에 노출될 가능성은 더 높아졌죠.
그런 식으로 엄청난 성과가 축적되어 하나의 작은 분야가 형성되고, 그 분야를 옹호하는 수요층도 어느 정도 잡히는 상황이 되면, 그 장르에서도 대표 선수처럼 보편성의 천재가 등장하여 대중에게 크게 각인되기도 하죠. 그렇게 그 작은 분야의 인지도가 높아지죠.
물론 그 유명 아티스트는 사실 빙산의 일각이죠. 어찌 보면 어떤 천재 하나가 세상에 드러나기 위해서는 빙산의 아랫부분이 있어야 해요. 그린데이가 유명해져서 그린데이와 오프스프링 정도가 있을 줄 알았던 네오펑크 씬도 꽤 탄탄하게 형성되어 있듯이요. 우리가 대중적으로 인식하는 인기 음악가의 저변에 이런 언더그라운드적 요소가 필수적이어야 새로운 음악 장르로도 버틸 힘이 생겨요. 후발 주자의 지속적인 배출도 가능해지고요.
재즈에서도 그래요. 루이가 재즈를 만든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루이는 재즈를 배웠죠. 이미 있었다는 소리죠. 어쩌면 루이는 '재즈를 현대적으로 완성한 첫 번째 대가'라고 해야 맞아요. 그리고 그 앞에 수없이 포진된 1세대 음악가들이 있었죠. 그들이 없었다면 루이도 없었을 거예요. 그들은 조금 덜 다듬어진 초기 재즈를 연주했죠. 이중 전설적 연주자로 꼽히며 재즈 최초로 압도적인 기량을 지닌 것으로 평가된 연주자가 디딤돌 역할을 했고요.
20세기 들어서자마자 활발히 활동했다고 보이는 버디 볼든이라는 연주자였어요. 재즈의 창시자란 말도 있고 연주가 압도적이었다고 하던데, 녹음 기록이 없어서 풍문으로만 돌아요. 벙크 존슨과 같은 동료 음악인이 그의 음악을 재연하는 방식으로 그의 연주 스타일을 짐작할 뿐이죠. 초기 뉴올리언스 재즈였어요. 여기서 중요한 건 버디 볼든을 인정할 만한 동료들이 존재했다는 것이에요. 그랬다면 다시 더 거슬러 올라가야죠. 아직 재즈가 모양을 잡기도 전부터 그것을 모색하는 더 많은, 이름 잊힌 모험가들이 있었다고 봐야죠. 때로는 다른 음악 장르로 묶여서 이름이 남아 있거나, 아예 전해지지 않는 이름으로라도요. 그 모두의 이름이 돌고 돌아서 루이 암스트롱으로 결집하고 있었죠.
말하자면 우리가 한 사람의 돌출적 능력으로 보는 것조차 사실은 견고한 사회적 시스템의 작용이라고 봐야죠. 사회를 비껴나서 혼자서 독창적으로 발상해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요. 천재가 개인기만으로 거대한 업적의 벽을 뚫고 나올 수 있을 가능성은 매우 낮죠.
단! 불가능에 가깝고 가능성이 낮을 뿐, 불가능하다거나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라고 보죠. 네, 불가능한 건 아니라고요. 드물게 존재한다고 믿어요.
사회는 갈수록 견고해지지만 만일 다양한 집단이 유기적으로 엮여서 단단한 응집력을 지니는 것일수록 필연적으로 그 틈새가 있기 마련이고, 설령 그 틈새가 더 빠르게 메워지는 추세라고 해도 그만큼 천재가 등장할 환경도 마련되거든요. 아무리 사회에 강력한 철갑옷처럼 여러 성과물을 집적해놓아도, 천재는 틈새만 비집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철갑옷의 한 조각을 떼어내서 뒤집어버리기도 하니까요.
혼자 한다면 성공 확률이 낮겠지만, 자기가 속한 집단의 동료들이 호응해준다면, 이론이나 수요의 지원 사격 덕분에 천재는 굶어죽지 않고 선봉장에서 사회에 질문을 던지는 데에 성공하는 것이죠. 그때 천재의 동료들도 함께 더 큰 공동체로 호출되고 대중에게 각인되죠. 만일 동료들이 함께해준다면 꼭 천재가 돌출적이고 신비한 성격 파탄자로 묘사될 이유도 없어요. 천재를 신격화하지 않아도 창의적인 사고는 연대를 통해서 천명되고 보편적 성과로 인정받을 수 있죠. 비밥의 천재 집단들이 했던 것처럼요.
사회는 이제 돌출적인 천재의 유형도 많이 경험했고 이에 대해 충분히 데이터를 축적했던 터라, 웬만해서는 천재라 주장하는 이들이 등장해서 흔들어놓으려 해도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오히려 없던 천재도 만들어서 호명한 뒤 호객 행위를 해서 천재를 팔아먹는 방법까지도 정교해졌으니까요. 천재 그 자체보다 천재를 감식하고 포장할 건더기를 찾아내어 물건으로 만들어내는 큐레이팅 능력이 중요해졌죠. 너무도 많이 쌓인 정보에서 효과적으로 의미 있는 정보를 끄집어내어 정돈된 방식으로 포장하는 능력이겠죠.
네? 왜 그런 걸 하냐고요? 글쎄요, 우리는 일을 하고, 일을 하면 반드시 성과가 있어야 하는 사회에 살고, 또 전년 대비로 항상 성장해야 하는 압박에 시달리죠. 어떻게든 뭐라도 만들어 팔아야 성과로 잡히는 사회잖아요. 그런데 천재는 잘 팔리는 상품이죠.
이런 빡빡한 상황에서 천재도 결국 사회의 변화에 따라 결에 맞춰 변화해야 하죠. 그럴 수밖에 없어요. 혼자서 할 수 있는 분야라면 고립된 섬처럼 버틸 수도 있겠지만, 대개 연대하거나 집단에서 공동으로 진행해야 하는 프로젝트가 많으니까요.
예를 들어 축음기가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1900년대 상황으로 돌아가 보죠. 노래를 녹음하려는 시도가 카루소를 통해 성공적이었어요. 그냥 호텔방에서 녹음했다는데 꽤 팔렸다죠? 카루소 때문에 축음기 대중화 시기가 앞당겨졌다는 평가도 있더라고요. 1920년대 레이스레코드가 인기를 끌면서 음반 시장이 폭발적으로 등장하는 등 사회적으로 기술이 끼친 영향은 엄청나죠. 기술 자체가 천재적인 셈인데 그건 사회의 역량이 축적되어 발명된 것이니 사회적으로 봐야겠죠. 이런 녹음재생 기술적 발전으로 관련 종사자들의 습관도 바뀌죠. 사회가 압박하는 시점이라고 해야 할까요.
예전에는 중산층 집안 거실에 피아노를 들여서 자식과 아내가 연주하는 풍경, 그게 성공한 풍경이라고 하더군요. 악보가 많이 팔렸죠. 그런 시기를 지나서는 이제 집안에서 축음기를 틀어놓고 와인 한 잔 걸치는 게 안정된 경제적 수준을 자랑하는 가정의 모습이 되었겠죠?
축음기는 큰 변화를 일으켰고 아마추어가 직접 연주하는 것보다 프로 연주자의 음악을 직접 감상하는 것으로 대체되었죠. 경쟁이 되기 어렵죠. 그 당시엔 녹음 기술이 조악해서 아직 버틸 만했겠지만 점점 악보보다는 음반으로 주류 산업이 바뀌죠. 흑인 재즈 연주자들은 녹음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 때문인지 인종차별 때문인지 최초의 녹음 기회를 놓치긴 했지만, 시대를 거스를 순 없었어요.
SP반 때는 녹음 길이도 짧았다가 차츰 뒤집어서 녹음할 수도 있는 LP도 등장하면서 교향곡 1곡 정도를 녹음할 수 있었죠. 훗날 CD 시대 때는 70분이 넘어가나요? 초기에는 길이가 짧아지면서 작곡가들은 압박을 받았을 거예요. 40년대였나, 라디오 시대에는 방송용으로 편집해서 더 짧아진 버전도 만들어야 했는데, 이러한 라디오 편집본은 지금도 여전히 있는 것으로 알아요. 녹음재생 기술이 없을 때는 굳이 필요 없을 작업이었지만요. 이처럼 기술의 발전으로 사회가 변하고 사회가 다시 변화된 규칙에 대해 사회의 소속원들에게 적응하라 요구하기 마련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