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는 사회 위에서 가끔은 나는 천재

[2.2]희정 & 천재론2

by 희원이

[목차: 천재론]

◑ 1부. 부자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 천재를 유형별로 분류하는 세 가지 방식

♬ 천재는 홀로 태어나는가?

♬ 자본주의와 천재

◑ 2부. 창의적 도전과 보상 체계

♬ 인정 욕구와 눈치 보기

♬ 정당한 보상과 문화적 토양

♬ 천재의 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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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희정: 뛰는 사회 위에서 가끔은 나는 천재

그렇지만 천재는 그러한 분위기를 교묘하게 거스르며 자신의 개성에 맞는 독창적인 자리를 확보해요. 천재 개인이 아니었으면 하지 못할 일도 있다고 봐요. 꼭 규칙에 수동적으로 적응하는 것만도 아니라는 거죠.

천재들이 이 지점에서 등장하는데, 누군가는 기술의 변화를 역이용하거나 능동적으로 그것의 변화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활용하죠. 녹음재생 기술도 마찬가지에요. 앞서 비밥 뮤지션을 말했으니 더 말해보자면, 그들에게 중요한 방법론이 상호 반응하는 연주, 즉석에서 즉흥연주를 하는 것이 있었죠. 처음부터 악보에 꽉 짜놓고 시작하는 게 아니라 연주자의 스타일을 즉석에서 많이 채워 넣게 되고, 그때마다 다르죠. 본인이 철저하게 통제하는 게 아니라 연주를 마치고 나서야 어떻게 연주가 되었는지 알잖아요. 클래식도 연주 전에는 모른다지만 이미 연습한 것을 충실히 수행했는가 하는 정도는 넘어서는 게 재즈 연주니까요. 그 기록을 녹음할 수 있게 되면서, 20세기에는 오래 전 클래식의 카덴차와 달리 ‘~카더라’는 식의 풍문으로만 남지 않을 수 있었죠. 불과 반 세기 전에 활동했던 버디 볼든의 연주가 풍문으로만 남아있는 것과 달리, 비밥 연주자들은 이제 즉흥연주를 음악의 정중앙에 끌어와서는 자기 장르의 중요한 방법 중 하나로 자리매김시킨 것이죠.

만일 녹음기술이 없었다면 그러기가 어려웠겠지만, 그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대개의 장르에선 자기 작품을 기록한다는 의미에서 멈추었죠. 그런데 어떤 이는 스튜디오 앨범에서 그 진가가 더욱 빛나도록 녹음 기술을 활용한 상상을 시작했고, 비밥의 경우에도 더욱 밀어붙이는 즉흥연주를 해도 공허해지지 않을 수 있었어요. 녹음반으로 비평도 할 수 있었고 공론화할 수 있었던 거죠. 찰리 파커의 유려하고 자유분방한 연주 사이로 흐르는 즉흥의 묘미, 이걸 지금도 들을 수 있게 되었고, 연주자들은 적어도 자기 연주가 전해지지 않는 비애 같은 것을 느끼지 않았겠죠. 분명 사회적으로 녹음 기술의 영향이 지대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밥이 생길 것이란 장담은 할 수 없었죠. 그 상황에서도 여러 선택이 있을 수 있고, 실제로 많은 천재 음악가들이 그러한 다양한 방식을 선보였어요.

결국 천재들은 변화된 상황에 수동적으로 매몰되지 않고 그 변화를 자기에게 기회로 바꿀 수 있는 통찰력과 과감성이 있는 것 같아요. ‘뛰는 사회 위에서 가끔은 나는 천재’인 셈이죠.


사실 좋은 쪽의 기술적 진보를 언급했지만, 말 그대로 전쟁 상황처럼 소모적인 사회적 문제에 봉착했을 때도 예술가는 사회의 한계 내에서도 창작을 최적화하다 보니, 단순히 수동적으로 상황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만의 특징적인 요소를 능동적으로 잡아채죠. 사회적 압박만으로는 창의적 발전이 힘들다고 보죠.

예를 들어 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전쟁에 참전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스윙 빅밴드에서도 인원들이 징집되는 경우가 생기죠. 클래식계로 1940년 초반에 미국에서 실내악 위주로 공연이 많았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때도 징집으로 인원을 확보하기 어려운 이유도 있었죠. 재즈계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런 상황에서도 소규모 캄보 구성은 가능했죠. 빅밴드에서는 2~3명이 빠지면 골치가 아프지만, 캄보 편성으로는 언제든 헤쳐모여 하면서 다양한 편성으로 실험을 시도할 수 있었죠. 독주, 이중주, 삼중주, 사중주, 오중주, 육중주 등 모이는 대로 하기 나름이었죠. 정교하게 악보를 중심에 두고 편곡하는 작업 부담도 클래식보다 상대적으로 적었고요. 그들은 그렇게 사회의 한계에 맞춰서도 창의적으로 비밥의 개성을 확립해나갔죠.


그렇다면 마약은 어떨까요? 1940년대였나요? 이때 각성제 남용 현상도 심하고, 마약 유통도 흑인 사회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고 하죠. 실제론 그 정도인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콜리어의《재즈 음악의 역사》란 책을 보니 약 50~70%에 해당하는 밥 플레이어들이 마약을 경험했다고 하더라고요. 여기에 1/4~1/3은 심한 마약 중독자가 되었고, 약 20%에 달하는 사람들은 마약으로 인하여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네요. 심각했다는 의미죠. 실제로 찰리 파커도 각성제를 남용했고, 결국 마약 투약으로 번져 심각한 헤로인 중독을 극복하지 못하고 단명했죠. 빌리 홀리데이, 쳇 베이커, 리 모건, 빌 에반스 등등 많은 재즈인이 마약 중독으로 직간접적으로 불우한 삶을 살았어요. 오죽하면 재즈 비평가 베렌트는 마약이 당시 흑인 사회에 퍼져서 재즈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사회학적 연구가 필요하다가 제언했었죠. 이는 꼭 재즈계에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 흑인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죠. 싸구려 코카인 제품 때문에 레이건 정부 시대 때 흑인 사회의 심각한 균열이 있었듯이, 1940~1950년대 미국에서 마약은 흑인 사회를 위협했어요. 1960년대야 히피 문화가 급속도로 퍼져서 젊은 세대가 LSD, 코카인에 찌들었지만요. 그러고 보면 이 마약은 참 많은 젊은 음악가들의 목숨을 앗아갔죠. 전 이 마약 탓에 천재로도 불렸을지 모를 전도유망한 젊은 예술가들이 아무도 모르게 쓸쓸하게 죽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요. 사회가 개인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것이고, 바람직하지 않은 사회의 모순 현상으로 개인의 행보에 큰 영향력을 받은 것이에요.


그런데도 놀라운 건 반드시 그러한 상황을 견디면서도 예술사적인 성과를 선취해버리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이었죠. 찰리 파커만 해도 그래요. 수많은 가능성의 존재들이 마약 마련할 돈을 구하기 위해 불러주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연주를 할 때, 그런 무절제한 태도로 막 살았는데도 동료들이 모두 경탄할 만한 성과를 냈으니까요.

사실 사회에 속박되더라도 결국 그 사회를 만들어낸 것은 인간이잖아요. 인간이 홀로 있다가 여럿이 뭉쳐서 집단을 이루었을 원시의 어떤 순간에 함께 살기 위해 규칙이 필요했고 공동체를 합의한 거니까요. 그 공동체를 움직이는 무언의 규칙, 가치 체계도 그런 과정에서 생겨 그것으로 인간을 훈육한 거라고 봐야겠죠. 대개는 그 과정을 잊는 것이지만, 천재들은 지금의 속박을 합의하지 않고 언제든 우리 스스로 기존 시스템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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