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목차: 한여름에 우주]
제1장. 그때 우주
제2장. 우주의 부재
제3장. 우주에 하나
[소개글]
- 이 성장소설은 스냅사진처럼 짧게 찍은 어떤 풍경을 통하여 이야기를 진행한다. 콩트처럼 운영하지만, 내용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구상하였다.
- 카페 블루에서는 영화를 상영해주는 날이 있었다. 우주는 그곳에서 영화를 즐겨봤고, 그날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인 '블루'를 상영해주기로 했기에 그녀로선 더욱 설렌다. 어쩌면 종훈이란 친구와 마지막으로 영화를 보는 것일 수도 있을 텐데, 그에 대해 착잡한 마음이 있기는 한 건지.
♬ 블루
지은 지 1년이 채 안 된 건물은 깔끔했다. 우주와 나는 2층 블루에 오르는 경사 가파른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계단은 짙은 나무색이었고 파란 조명등이 벽 간간이 섞인 은색 메탈 재질과 어우러져 서늘하게 빛났다. 입구에는 영화 포스터들이 걸려있었다. 따뜻한 자연미와 세련된 인공미가 이제는 익숙해졌다. 계단을 올라 블루의 문을 열려고 할 때 문 옆 작은 칠판에 「오늘의 상영작: 블루」라고 쓰여 있었다.
블루의 실내는 계단의 콘셉트와 같았다. 메탈재질과 나무재질을 아우르며 조명등은 바다처럼 파란 불빛이 산란했다. 불빛이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을 만들어 주는 착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앉은 주요 테이블 바닥은 나무 재질이었는데, 바다를 걸어서 땅으로 가려면 계단 하나 정도 높이의 짙은 나무색 바닥을 딛고 올라서야 했다.
“어, 우주 왔구나.”
서빙을 마치고 쟁반을 들고 계산대로 오던 유미 누나는 우주를 반겼다. 얼마 전에 새로 들어온 아르바이트생이라는데 22살의 풋풋함이 살아있었다. 누나라고 부르기엔 어려 보여 우주 친구라고 해도 믿을 만했다. 목소리도 무척 상냥했다. 계산대 뒤에 자리 잡은 주방에서 조리사 아줌마가 창구로 얼굴을 빠끔히 내밀며 역시 우주를 반겼다.
“안녕, 아가씨 왔네.”
“사장오빠는요?”
“어이구! 섭섭하네. 그래도 숙녀라고 잘 생긴 남자만 찾고. 뒤에 데려온 친구는 남자 아닌가?”
우주의 물음에 조리사 아줌마가 웃으면서 짓궂게 반문했다. 우주는 그만 머쓱해져 나를 힐끔거렸다.
“그런 게 아닌데.”
우주는 얼버무렸다. 우주의 어설픈 반응 탓에 난 남자가 아닌 어떤 것이 돼버린 기분이 들었다. 조리사 아줌마는 웃으면서 창구에서 사라졌다.
“사장님, 잠깐 나가셨어. 오늘은 특별히 예약했지?”
“예, 언니. 친구가 서울 마지막 날이거든요.”
“아. 종훈이라고 했지?”
유미 누나는 한번 본 기억을 더듬어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예, 김종훈이요.”
내가 미처 대답하기 전에 우주가 말을 가로챘다.
“남자친구도 귀여운데 사장님은 왜 찾니?”
“언니!”
우주가 발끈하자 유미 누나는 웃음을 띠며 말을 멈추었다. 나는 장난감이 된 기분이 들어 얼굴이 화끈거렸다.
카페 안 모든 좌석엔 손님들이 가득 찼다. 물론 모두가 시간에 맞춰 영화관람을 왔다기보다는 토요일 저녁 목을 축이러 나왔다가 영화관람시간에도 블루에 있는 것이긴 했다. 유미 누나가 계산대로 들어가 CD와 영상자료가 빼곡한 자료함 옆 기기를 조작했다. 그러자 실내조도가 한 단계 낮아지고 잔잔히 흐르던 재즈가 멈췄다.
사람들 모두 볼 수 있는 큰 벽에서 스크린이 내려오며 그랑블루 포스터를 가렸다. 이내 카페 안에 웅장한 소리가 들리며 영화가 시작될 것을 알렸다. 우리 자리는 한반도의 서울처럼 카페 중앙에 마련된 나무색 복도 위에 있었다. 물론 테이블을 절묘하게 배치해서 창가에 있는 사람들의 시야를 가리지 않았다. 그러면서 모든 사람의 표정을 살피기 좋았다. 화면과의 거리도 적당해서 우주가 즐겨 앉는 자리다. 주변 바닥과 스크린에서 뿜어내는 파란 빛깔 때문에 나는 바다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즐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때 유미 누나는 새우깡을 가져와 탁자 위에 놓았고 나는 미처 주문하지 않을 것을 깨달았다.
“웰치스랑, 너는?”
“난 닥터 페퍼.”
유미 누나는 웃으면서 돌아갔다가 곧 얼음이 든 컵과 음료수가 든 캔을 자리에 갖다 주었다.
스크린에서는 국도를 달리는 차가 있었다. 귀여운 여자아이가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고 연료가 새는 것을 카메라가 잡아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사고가 난다. 할리우드 영화에 비하면 정말 긴박함이 떨어지는 충돌장면이다. 남자아이가 들판에서 놀고 있을 때 국도를 과속으로 달리다가 나무에 들이박는 차를 목격한다. 우주는 자신 앞에 놓인 웰치스를 컵에 따랐다.
“초반에선 이 장면이 가장 와 닿아.”
“아, 난 잘 모르겠는데.”
“생각해봐. 모든 격정의 시작이 너무도 평화롭게 오잖아. 그들의 세계와 전혀 상관없는 아이의 무심한 발견 속에서 너무도 단정하게 ‘쾅’ 소리를 내면서. 난 이 장면을 무심한 듯 지루하게 처리한 게 마음에 들어.”
우주는 꼭 이 말을 하고 싶었는지 너무도 진지하게 속삭이고 음료수를 한 모금 들이켜더니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낮은 조도였지만 파란 불빛에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낯빛이 보였다.
모든 사람의 낯빛 중에서 우주의 낯빛이 가장 격정적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도 닥터페퍼를 컵에 따라서 한 모금 들이켰다. 체리향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우주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생각해보면 이런 질문은 고스란히 내게로 향했다.
‘나에게는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어떻게 생각하면 아주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항상 모든 걸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습관 때문인지, 엄마의 침착함 때문인지, 집이 없어진다는 게 어떤 걸 의미하는지 모르기 때문인지 나는 그저 얼떨떨한 심정으로 최근 사태를 바라봤다. 어렸을 적 부산에도 잠시 살았다고는 하지만 특별히 기억나는 건 없었다. 외가에 다녀온 지도 5년이 넘어 서먹한 느낌마저 드는데 부산이라니…….
영화 속 줄리도 새로운 동네를 알아본다는 점에서 비슷한 처지였다. 변호사에게 재산처분을 맡기고 추억이 담긴 저택을 내놓더니 혼자 살 만한 작은 집을 구한다. 그녀는 과거를 잊기 위해 노력했다. 남편과 관련된 물건을 정리하면서 우연히 찾은 사탕을 빠르고 격렬하게 씹어 먹는 소리가 숨겨진 슬픔을 내비쳐주었다. 씹는 소리가 빠르고 격렬한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새로 거처할 집에 들어오자마자, 줄리는 파란 육각형 장식이 달린 샹들리에를 햇볕이 잘 드는 거실에 걸어놓는다. 빛은 파랬다. 그 빛에 줄리의 얼굴도 파랗게 젖었는데, 그녀의 얼굴에서 새로운 곳에 적응할 강인함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한밤중에 일어난 집단구타를 숨어서 지켜보든지, 현관문이 잠겨 집에 들어가지 못한 채 계단에 쪼그리고 앉든지 그녀는 자주 애처로워 보였다.
만일 내가 없다면 엄마도 줄리처럼 애처로울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줄리는 환청처럼 파란 음악을 느낀다. 사고의 목격자를 만나 목걸이를 건네받을 때도 암전과 음악이 오가며 줄리의 슬픔을 말한다. 줄리는 수영장에서도 환청을 듣고, 듣지 않기 위해 물속에 몸을 내맡기듯 담근다. 머리로는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을 알겠지만, 가슴에까지 그 슬픈 판단이 달려가지 못했나 보다. 멀고도 먼 머리와 가슴. 그 거리는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보다 멀까?
나는 분명 우주의 눈에 눈물이 걸리는 걸 보았다. 수영장을 파란빛이 스크린 밖으로 쏟아졌다. 갑자기 그랑블루의 지중해처럼 수영장의 파란빛은 우주의 눈물을 진하게 적셨다. 우주의 눈에는 줄리가 있었을 것이다. 줄리는 수영장에서 수영하다가 느닷없이 귀를 막은 채 물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고요하게 둥둥 떠 있었다.
그러던 그녀가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고는 그녀를 오래전부터 흠모한 올리비에에게 전화를 걸어 사랑을 표현할 것을 요구하더니, 사랑한다면 당장 집에서 만나자고 말한다, 밤에, 외가남자를, 남편 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거 뭐야?’
그 남자도 좀 불쌍한 것 같다. 저러고 버림당하면 좀 그런데.
‘넌 그래서 감수성이 없다는 소리를 듣는 거야.’
그랑블루를 볼 때 주인공이 갑자기 죽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투덜대자, 우주가 한 말이다. 하지만 이건 좀 부당한 단정이다. 맹세코 우주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나에게 감수성이 없다고 충고한 적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우주에게는 블루가 특별한 의미로 다가갈 수도 있지만, 나에게 블루는 지루한 영화일 뿐이었다. 할리우드영화에 길들여진 나로서는 폴란드영화감독의 작품이라는 것이 신비하기도 했지만, 10분도 안 돼서 별말도 없고 사건도 밋밋한 영화에 그만 질리고 말았다. 결국 내 눈에도 조용히 눈물이 걸렸다. 하품이었다. 또 눈물이 걸렸다. 역시 하품이었다. 누가 보면 우주보다 내가 더 감동한 줄 알았을 것이다.
내 눈물도 빛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해서 파란빛을 산란해야 할 텐데. 혹여 여러 갈래로 핏발 선 눈에서 붉은 광선을 뿜어대지는 않을까? 컵 안에 든 체리맛 닥터페퍼를 눈 가까이 바짝 가져왔다.
주변을 돌아보니 벌써 영화에서 관심을 거두고 자신들의 대화를 하는 이들이 생겼다. 우주는 주변을 잊은 채 영화에 집중했다. 나는 불현듯 우주 눈 속에 있을 수영장을 상상하다가 아까 마신 콜라와 지중해가 생각났다.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섰다. 역시 우주는 나를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화장실에 들어서자 나프탈렌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소변기에 재어놓은 얼음만큼이나 시원하게 느껴지는 냄새를 독서실 화장실에서도 흔히 맡을 수 있었다. 분명 좋은 냄새는 아니었지만 오줌 지린내가 나는 것보다는 나았다. 화장실을 나오자 유미 누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잊지 않고 미소를 보여줬다.
‘상냥하단 말씀이야.’
유미 누나는 이목구비가 특별히 눈에 띌 정도로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조화를 잘 이뤄 예쁘장하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들을 외모를 지녔다. 유미 누나를 본 것이 겨우 세 번째이기 때문에 터놓고 친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그게 나로서는 아쉬웠다.
그녀는 주문받은 술이나 안주를 나르는 것 외에는 주로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혹시 우리 엄마 작품을 읽어봤는지 물어보고 싶기도 했지만 내가 블루에 올 때는 주로 우주에게 끌려 영화를 보러 오는 경우가 많아서 따로 유미 누나에게 다가가 시시콜콜한 잡담을 할 짬은 없었다. 우주의 기상은 생각 이상으로 서슬이 시퍼렇다. 우주의 잔소리는 그 어떤 것보다도 피해가고 싶은 메뉴였다.
“넌 어쩌자고 밤낮 여자한테 집적거리니?”
이따위의 억울한 누명을 쓰는 것보다 참고 앉아서 예술영화를 보는 편이 나았다. 혹은 졸든지. 안 그래도 벌써 눈이 따끔거렸다.
나프탈렌의 독성과 블루의 지루함,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어둡고 안락한 상태를 지속하니 눈이 따끔거릴 만도 했다. 나는 우주의 잔소리를 피하려는 정신적 선택과 눈이 따끔거리는 육체적 고통에 심술이 나서 우주를 약 올리고 싶어졌다. 나는 천천히 우주 곁으로 다가가 자리에 앉기 전에 우주 귀에다가 속삭였다.
“너, 냄새나.”
순간 귀가 솔깃했는지 우주는 나를 잠시 보더니 자신의 옷을 살피며 냄새를 맡으려 시도했다. 우주는 긴장한 듯 킁킁거렸지만 당연히 냄새나는 곳을 찾을 수 없었다. 냄새는 나지 않았으니까.
“냄새가 나긴 뭘 난다고 그래?”
“진짜 난다니까. 담배냄새.”
“웃기지 마. 네가 그걸 어떻게 맡아? 피운 지도 오래돼서 넌 맡을 수 없을 텐데. 이상하다.”
우주는 계속 킁킁거렸다.
“케첩 냄새도 나. 진하게.”
“너 뻥 치는 거지?”
“진짜라니까. 아직도 모르겠어? 온 카페에 네 냄새로 가득해. 지금.”
“죽는다.”
“거참, 친구가 충고하면 좀 들어라.”
“쓸데없이 장난치려거든 잠이나 자.”
나는 적어도 마음 편하게 졸거나 잘 수 있게 되었다. 우주는 곧 냄새 맡기를 포기하고 영화에 집중했지만, 가끔 냄새를 맡으려고 킁킁거렸다.
영화는 더욱더 지루해졌다. 이야기는 자꾸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별다른 이야기도 아닌 듯한데 저런 영화를 왜 만들었을까?’
늘 블루를 볼 때면 이런 궁금증이 일었다. 결국 그 궁금증조차 증발할 무렵인 영화 중반부에 이르면 아예 이야기의 중간부터 거의 끝부분까지 송두리째 들어내 버렸다.
“야, 또 자냐? 그렇게 영화가 지겹니?”
우주가 탁자를 두드리며 나를 깨웠을 때 장중한 교향곡이 흘렀고 줄리가 보였다. 그리고 영화가 끝났음을 알리는 자막이 보였다.
“자도 된다며?”
“그건…… 말을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