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형 / 질투 / 화이트는 너무 약한 색이야

소설

by 희원이

[목차: 한여름에 우주]

제1장. 그때 우주

제2장. 우주의 부재

제3장. 우주에 하나


[소개글]
- 이 성장소설은 스냅사진처럼 짧게 찍은 어떤 풍경을 통하여 이야기를 진행한다. 콩트처럼 운영하지만, 내용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구상하였다.

- 우주가 신경 쓰던 사장형이 등장하는 대목이다. 그를 통해 서브컬처에 관해 조금은 알게 되어, 이 방면을 궁금해했다면 아무래도 우러러보게 되는 면도 있다. 우주도 사장형을 그런 식으로 바라보아서 그런지, 연모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 같아서 그런지, 종훈으로서는 조금 질투도 났다. 우주는 사장형과 대화하는 순간이 즐거운 듯하다.
그런데 평소에는 사장형을 만나서 길게 대화하는 편인데, 그날따라 우주는 굉장히(?) 빨리 자리에서 일어선다. 택시를 잡아타고 우주의 비밀 아지트인 '고향'으로 향한다. 그 전에 이별주를... 미성년자라 그러면 안 되는데... 애들이 따라하면 안 될 거고.
그러나 파급 효과 큰 드라마와 달리, 일반의 소설일 뿐이니, 일단 처음의 설정대로 하자.





♬ 사장형

“사장형 왔다.”

“넌 죽음의 영화를 보지는 않고 죽음의 잠만.”에서 우주의 말이 끊겼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유미 누나가 사장형에게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사장형의 시선이 우리에게 꽂혔다.

“우주구나.”

“네, 사장오빠.”

“안녕하세요.”

“종훈이 오랜만이네. 이사 간다며? 부산으로? 그냥 서울에 있지 그 멀리까지 가긴 왜 가?”

“아, 예. 그렇게 되었어요.”

얼버무리는 나에게 반갑다며 호쾌하게 웃는 사장형은 얼굴이 갸름하고 다소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쾌남아였다. 파란색으로 염색한 짧은 머리가 바늘처럼 빳빳이 서 손끝이 스치기만 해도 베일 것처럼 날카로워 보였다. 왼쪽 귀걸이와 미국에서 직수입한 구제 청바지는 세련된 느낌을 주었다. 게다가 잘 단련된 몸매에 구릿빛 피부……. 하지만 어쩐지 쫄슬리퍼형 샌들과 구제청바지는 어울리지 않았다. 인도에서 사왔다는 알록달록 팔찌, 친구가 직접 액션페인팅했다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전위적인 티셔츠까지. 사장형만의 독특한 개성으로 받아들였지만 내 취향은 분명 아니었다.

“사장오빠, 어디 갔었어요?”

“사장오빠는, 무슨. 이름 불러.”

본명은 김민수였지만 본명을 부른 적은 거의 없었다. 나와 우주에게 사장형은 이미 ‘사장형, 사장오빠’로 굳어진 지 오래였다. 사장형도 이미 익숙해진 듯했다. 가끔 본명을 부르라곤 했지만 만류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표정에도 싫지 않은 기색이 보였다. 사장형은 1년 전 우주가 하이텔 동호회 서브컬쳐에 가입하면서 알게 되었다. 당시 사장형은 서브컬쳐의 운영진이었고, 우주는 대중문화 전반에 관심을 지닌 서브컬쳐에 가입했다. 워낙 사교성이 좋은 터라 고등학생임에도 모임에 자주 나가면서 정식회원으로 인정받았다.

“그나저나 우주 넌 도대체 블루를 몇 번째 본 거니?”

우주는 손가락을 잠시 꼽더니,

“한 열두 번쯤 본 것 같아요. 블루에서는 오늘로 세 번 봤고요.”

헉, 열두 번.

“이야, 나랑 거의 비슷하게 봤는데. 역시 대단해, 우주는.”

조심스럽게 미소 지으며 쑥스러워했다, 천하의 한우주가. 매우 크다고 ‘한’을 길게 빼던 한우주가.


26살이었지만 22살 정도로 보이던 사장형은 여자에게 인기가 좋을 만도 했다. 게다가 부잣집 자제라는 소문이 있었다. 마땅히 할 일 없는 자식을 위해 마련해 준 가게가 블루라는 소문도 있었다. 벤츠 스포츠카 동호회에서 만난 여자 친구와 사귄다는 말도 있고, 줄리아나 나이트클럽을 전전하며 수많은 여자를 후린 바람둥이란 말도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소문이었고 그 소문의 진원이라 해봐야 우주밖에 없었다. 이런 대수롭지 않은 소문을 생각하지 않은 채 사장형을 볼 때는 남자가 봐도 호감이 생겼다. 그만큼 성격도 온화하고 화술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다. 적당히 위트 섞인 말로 대화를 이끄는데, 대화의 내용은 다양해서 문화적인 소재로 고상한 분위기를 만드는가 하면 일상적인 이야기를 유쾌하게 이끌기도 했다.

“아쉬워서 어떡하냐? 종훈아, 부산 가더라도 연락하고 서울 오면 들러. 아니다. 서울로 대학 오면 자주 보겠구나. 꼭 서울로 대학 와라. 너 공부 잘하지? 그러면 명문대학으로 와.”

“공부야, 그냥 그렇지만 꼭 서울로 대학 와야죠.”

시간은 9시 30분을 조금 넘겼다. 사장형과 우주는 자주 만나서일까, 공통화제가 많았다. 혹여 일상의 화제가 맞지 않더라도 공통 관심사인 영화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도 하루 이틀쯤은 거뜬히 셀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카페 안은 다시 재즈로 가득 채워졌다. 스크린이 걷히고 그 자리에 그랑블루 포스터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사장형은 어느새 우리 자리에 앉아 대화를 주도했다. 한 달 전에 왔을 때는 데이비드 린치라는 감독에 대해 알아듣기 어려운 소리를 풀더니만, 오늘은 재즈 쪽으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사실 색소폰 소리가 들리고 드럼 두드리는 소리가 나니까 재즈라고 알지, 특별히 재즈에 관심을 둔 적이 없는 내게 그들의 대화는 신기한 사람들의 신기한 놀음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떻게 저렇게 따분한 주제를 가지고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내가 유일하게 버릇이 든 고상한 취미를 들자면 클래식 감상이다.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들었기 때문에 별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듣게 되었다.

물론 듣는 데 무리 없다는 말이지, 광적으로 찾아 듣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이런 자리에선 어설프게 기억하는 몇몇 용어를 언급하며 나도 꽤 고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슬쩍 드러내는 수동적 방어 전략을 구사한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점은 내 주제를 정확히 알고 알맞은 시기에 얼버무려야 한다는 것이다. 자칫 임자 만나면 개망신당하기 일쑤다. 이를테면 우주와 사장형처럼.

“종훈아, 너도 한번 관심을 가져봐. 이런 취미가 처음엔 지루해 보여도 빠지면 다른 어떤 취미보다도 유익하고 흥미진진해. 아, 참, 너 클래식은 좀 듣는다고 했지?”

이럴 땐 재빨리 꼬리를 내리는 게 상책이다.

“아뇨. 클래식을 듣긴요. 자세히 알고 듣는 건 없어요. 그냥 듣기 편해서 좋다는 거죠.”

“그러면 되는 거지. 자주 듣다 보면 미처 듣지 못한 것을 듣게 되고 그러다가 흥미가 생겨서 찾아 듣는 거야. 너만 괜찮다면 우리 서브컬쳐에 들어와. 넌 우주 친구고 아끼는 동생이니까 특별히 바로 정식회원으로 해줄게.”

“고마워요, 사장형.”

“또, 또. 사장형? 이름 부르라니까.”

“알았어요. 민수 형.”





♬ 질투

무척 낯선 단어를 내뱉고 나니 어째 대화가 끝나지 않은 것 같은 묘한 느낌이었지만 곧 다른 화제로 넘어갔고, 간간이 물어오는 사장형의 질문을 받기 전에는 사장형이 새로 시켜준 콜라를 홀짝거리며 우주와 사장형을 번갈아 보았다. 사장형의 대화가 길어질수록 어쩐지 나는 그 자리에 없는 사람 같았다.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우주가 내 존재를 잊은 듯 사장형에게 열중하는 것도 그랬지만, 그 태도가 너무 조신했다는 점도 얄미웠다. 왠지 소외되었다는 섭섭함에 콜라만 홀짝거렸다. 얼음이 자꾸 치아에 부딪혔다, 차갑게.

‘어떻게 한 번도 안 쳐다볼 수 있지? 치사.’

시간은 오후 10시를 향해 달렸다. 심심하게 얼음을 씹어 먹으며 줄리가 사탕을 씹어 먹던 걸 떠올렸다.

‘말도 안 돼!’

사장형에게 질투를 느끼는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좀 어이가 없어 강하게 부인했다. 아무리 우주랑 각별하게 지낸다 하더라도 친구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우주가 다시 조심스럽게 웃었다. 칫. 아무래도 너무 빨리 마음을 접은 우주가 야속했다.

‘한번 찔러보고는 바로 다른 쪽 찌르는 것 좀 봐.’


“그만 가야 할 것 같아요.”

우주의 갑작스러운 말에 나는 시계를 보았다. 평소보다 빠른 편인 10시였다. 하기야 블루의 상영시간도 다른 영화에 비해 짧았으니 이해할 만도 했지만, 사장형과의 대화도 평소보다 짧은 편이었다.

“웬일이니? 이렇게 일찍 가고?”

아니나 다를까 사장형이 우주에게 물었다.

“그냥, 오늘 일이 좀 있어서요.”

“그래, 그럼 다음에 보자. 종훈이도 잘 가고. 다음에 근처에 오면 꼭 들르고. 알았지?”

“예.”

나는 멋쩍게 웃으며 간단히 답했다.

“우주야, 잘 가. 종훈이도 잘 가고.”

유미 누나가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다.

“예.”

우주와 나는 동시에 유미 누나의 인사를 받았다. 문을 열고 블루를 나오자 귀에서 ‘뿌뿌’거리던 관악기 소리가 사라졌다. 대신 매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래에 보이는 큰길에선 헤드라이터를 켠 차들이 움직였다.

“유미 누나, 아무리 봐도 예쁘단 말씀이야. 아쉽다.”

“또, 또. 밝히긴. 어휴.”

“뭐, 어때? 예쁜 걸 예쁘다고 하는데.”

“하기야, 네 입이니 네 자유지.”

우주는 못 말리겠다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지는 사장형 안 찍었나?”

“그런 게 아니야!”

우주는 정색했다. 순간 나는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처럼 흠칫했다.






♬ 화이트는 너무 약한 색이야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우주의 말에 답하는데, 매미 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주변에 나무가 보이지 않았지만, 건물 건너편에서 시끄럽게 웅웅거렸다. 어쩌면 이 골목길에서 듣는 마지막 매미 소리인지도 몰랐다.

“그건 그렇고, 너 정말 블루 열두 번 봤니?”

“응. 왜? 못 믿겠니?”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많이 볼 수 있니? 지겹지도 않니?”

“뭐가 지겹니? 좋아하는 영환데.”

“여하튼 대단해.”

“레드는……”

“레드는?”

“일곱 번. 화이트는 두 번.”

우주는 기억을 끄집어내곤 흡족해했다.

“그런데 왜 화이트만 두 번이니?”

“화이트는 별로야. 블루는 죽음이고, 레드는 좋아.”

“블루만 너무 편애하는 거 아니니? 화이트에도 좀 애정을 줘봐.”

“물론 세 작품으로 국한할 때 그렇다는 거지, 다른 영화에 비해서는 화이트도 꽤 좋아해.”

“그런데 왜 하필 화이트를 별로라고 보니?”

“세 작품 중에서.”

“그래, 세 작품 중에서.”

“그냥. 그냥, 그래. 그건 정말 그냥이야. 영화 내용보다는 색깔이 블루나 레드가 화이트보다 좋아.”

“화이트가 뭐 어때서? 순결의 색, 천사의 색인데.”

“죽음의 색이기도 해, 우리나라에선. 또 무기력의 색이고, 너무 착한 척하는 색이란 말이야.”

하기야 그런 색깔이 우주와는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 우주가 날개 달고 하얀 드레스를 입고 천사처럼 행동하면 주변에 먹구름이 낄 게 분명하다. 담배 냄새가 나거나.

“또 너무 약한 색이야. 우리 여자들은 왜 맨날 하얀 소복 입고 당하냐고! 눈물 질질 짜는 거 정말 싫어.”

우주는 ‘정말’을 정말 강조했다.

“그래, 알았어.”

나는 우주의 말에 수긍했다.

“그럼 레드랑 블루는?”

“레드랑 블루는 각각의 색을 고집하잖아. 빛의 삼원색, 색의 삼원색에도 블루와 레드는 빠지지 않아.”

“화이트는 무채색이라 특별하지 않니? 채도 없는 색.”

“개성이나 열정이 없다는 느낌으로 다가와.”

우주는 끝까지 소신은 굽히지 않을 태세였다. 나는 결론이 정해진 대화는 의미가 없는 듯해 화제를 돌리려고 했다.


“해커다.”

“응?”

“해커라고. 우리 해커 갈까?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나는 인도로 올라서며 우주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쳐다봤다. ‘해커’라고 쓰인 네온사인 번쩍이는 간판 밑에 무전기를 든 삐끼들이 입구에서 서성댔다.

“저기 록카페잖아? 네가 전에 퇴짜 맞았다던.”

“그래, 록카페, 전에 퇴짜 맞은.”

그래 봐야 불과 두 달 전 일이다. 누가 어설픈 놀라리 아니랄까 봐 제대로 출입하지도 못하고 걸려서 쫓겨난 우주.

그 곳 더럽게 까다로워서 그런 거란 말이야, 라고 강변하던 우주.

놀랐니? 이 놀라리야, 라고 놀리던 나.

“그때 실패했지만 지금은 가능해. 가자.”

우주는 해커 쪽으로 내 팔을 살짝 잡아끌었다.

“해커는 가지 말자. 좀 그렇다.”

“괜찮아, 괜찮아. 내가 알아서 할게.”

우주는 거절하는 나를 놓아두고 거침없이 걸어갔다. 나도 어쩔 수 없이 따라갔지만 삐끼는 우리를 입구 앞에서 세웠다. 우주와 나는 아직도 어린 티를 벗지 못한데다가 차림새까지 영락없이 고등학생이었다. 거기다 우주는 그 나이로 봐주지 않을 만큼 어려보이기까지 했으니 두 사람이 무슨 수로 걸리지 않을 수 있겠나.

“잠깐만요. 신분증 좀 보여 주세요.”

그 말이 왜 그리 커다랗게 들렸는지, 나는 그만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입구 옆으로 몸을 빼고 말았다. 하지만 우주는 무슨 속셈인지 자연스럽게 삐끼에게 다가가 뭔가를 말했다. 대범한 건 알아줘야 한다. 잠시 후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중에 오면 싸게 해주기예요!”

우주는 웃으면서 자연스럽게 내게 다가왔다.

“안 된다네. 요새 시험 끝나서 단속이 심하대. 대신 나중에 오면 싸게 해준다는군. 아쉽다. 그지?”

‘어떻게 했기에?’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집 쪽으로 가자.”

“너 일 있어서 일찍 나온 거 아니니?”

나는 물었다.

“응. 네가 일이지.”

“응?”

“너, 마지막 밤이니 그게 일이지.”

“아.”

의외의 배려. 나는 놀랐다.

“택시!”

우주는 손을 들어 택시를 세웠다.


택시는 우리 동에서 한 블럭 떨어진 곳에 섰다. 우주는 차비를 내고 내렸다.

“집은 저긴데, 왜?”

“술 마셔야지.”

“술?”

“그럼 친구 보내는데 이별주는 먹여 보내야 하는 거 아냐?”

“이별주?”

“그래, 이별주.”

이별주라는 말을 듣는데 구멍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들어가자.”

“걸리면 혼나.”

“누구한테? 엄마한테?”

“아니, 그게 아니라. 구멍가게 아저씨가 뭐라 그런다고?”

나는 우주가 나를 마마보이나 겁쟁이로 보는 듯해서 기분이 조금 상했다. 술을 마신 건 일 년 전 학원에서 강사가 단체로 사주었을 때가 처음이었다. 그때도 기껏해야 캔 맥주 하나였고 그 뒤로는 마셔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어른을 동반하지 않고는 처음이었다.

“괜히 걸리면 골치 아프다고.”

“야, 누가 술 사는데 신분증 달라고 그러냐? 여기가 무슨 나이트냐?”

“알았어, 알았다고. 가면 되잖아.”

“진작 그럴 것이지. 대신 내가 살 테니까 넌 뒤에서 가만히 있어.”

우주의 손에 이끌려 가게로 들어가는 모습이 진짜 마마보이 같다는 생각이 들어 슬쩍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우주의 손을 내 옷에서 떼어냈다, 슬며시. 우주는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당당히 냉장고를 열어 캔 맥주를 여섯 캔 꺼냈다.

“저걸 다 마셔? 배 터지겠다.”

“뭐든지 모자란 것보다는 남는 게 좋아.”

조용히 속삭이자 우주는 일부러 소리를 높여 말했다.

‘우주돌이.’

긴장해서 오그라든 가슴이 오징어 몸통 같았다. 불꽃에 데여 쪼그라들더니 이내 절망하여 더 쪼그라드는 것을 포기한 듯했다. 우주가 캔 맥주를 들고 있는 동안 나는 과자 몇 개를 집어 우주 곁으로 갔다. 우주가 계산대에 맥주를 내려놓았다. 나는 과자를 내려놓았다. 잠시 나는 딴청을 피우며 아저씨의 반응을 살폈다.

정말 우주의 말대로 아무런 제재 없이 계산을 해주었다. 친절하게 봉지에 담아주기까지 했다. 우주는 한술 더 떠 양념오징어구이와 츄파춥스 두 개까지 계산대에 놓고는, 여유롭게 만 원짜리 한 장을 아저씨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거스름돈을 받아 들고 구멍가게에서 완전히 빠져나올 때까지 조마조마했다. 혹시 아는 사람을 만나지는 않을지 걱정했다. 동네아줌마나 선생님들이라도 만나는 날엔 정말 큰일이다.

물론 우주 말대로 아파트 단지가 달라 발각될 가능성은 적어 보였지만, 혹시 아는가? 재수가 옴 붙었을지.

“넌 내일 이사 갈 애가 뭘 그렇게 겁내니? 소심하긴.”

우주의 핀잔에 나는 발끈하려다가 문득 그것도 일리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keyword
이전 10화블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