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에 순종하느냐, 후원자에게 순종하느냐

[1.2]동호 & 천재론2.1

by 희원이

[목차: 천재론]

◑ 1부. 부자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 천재를 유형별로 분류하는 세 가지 방식

♬ 천재는 홀로 태어나는가?

♬ 자본주의와 천재

◑ 2부. 창의적 도전과 보상 체계

♬ 인정 욕구와 눈치 보기

♬ 정당한 보상과 문화적 토양

♬ 천재의 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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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동호: 자본에 순종하느냐, 후원자에게 순종하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예전이요? 자본주의가 있기 전이요? 현대 자본주의 이전에는 어땠을지 저도 궁금하죠. 그러니까 한 18~19세기라면 될까요? 그때도 자본주의가 있었다고 해야 할 테니, 더 이전이라고도 봐도 될까요? 중상주의 뭐 이런 시대인가요? 이것도 자본주의 아닌가요? 자본주의에 관한 전문가는 아니니까요. 흔히 말하듯 자본으로 사회가 돌아가는 구조가 제대로 구축된 걸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산업혁명 이후라고 본다면, 그 전 시대로 볼 수 있겠네요. 꼭 그러지 않고 중세라 해도 사람이라면 자고로 밥을 먹고 살아야 하는데, 고매한 예술을 하면서 이슬만 먹을 순 없잖아요. 만일 예술을 하는 사람에게만 특별한 자격이 부여돼서 이슬만 먹어서 살 수 있게 된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영양분 다 공급되고 굶어죽을 걱정도 없으면, 상당히 과감해질 거예요. 그러지 못한다면야, 그런 식의 모험을 한다는 건, 절박하게 고독사하는 경우도 각오한다는 의미겠죠. 사회적 명성을 기대하는 것은 고사하고요. 너무도 불확실한 모험을 하는 거죠. 예술이란. 아, 갑자기 제 넋두리를 늘어놓았네요. (웃음)

여하튼 베토벤 전후의 시절을 말씀하시는 거면 1800년대 전후일까요? 그 시절이라면 현대 자본주의는 아니지만 자본주의가 성장하던 때겠네요. 제국주의의 이름으로요.

우리나라에선 세도정치의 전성기였네요. 약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의 정조 시대쯤 되려나요. 아니면 영조 시절일까요? 바흐가 있던 시절로 돌아가도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열심히 작곡을 해야 했죠. 돈이란 자본주의 시대가 아니더라도 늘 중요한 문제였죠. 표현을 달리 하자면, 돈을 생계로 바꿀 수도 있고 풍요에 대한 갈망으로도 바꿀 수도 있겠어요. 돈 말고도 당시엔 계급의 자부심 등 어떤 사람이 살아가게 하는 여러 근거가 있기도 하였지만, 어쨌든 아무리 지체 높은 양반도 입에 풀칠을 못하면 제대로 행세하기 어렵죠.

<허생전>을 보면 잔반이라고 삼대쯤 벼슬을 못하여 이런저런 이유로 가문이 몰락하다시피 기운, 소위 망한 양반들은 비웃음의 대상이었죠. 권위를 내세울 수 없을 만큼 추레했죠. 물론 앞에서는 감히 계급 차이 때문에 함부로 대하지는 못했다는 점이 지금의 자본주의 때와는 다른 점이겠지만요. 그건 유럽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당장 인부들에게 삯을 치를 수 없다면 아무리 계급의 위세로 횡포를 부려보아도 한계가 있어요. 중세 때는 더했죠. 계약 관계로 맺은 군신 관계, 영주와 농노 관계라면요. 많은 횡포를 참아주더라도 입에 풀칠도 못하게 한다면, 가만히 있을 사람은 없죠.

그런 점에서 최소한의 생계 정도는 예술을 하면서도 해결해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어느 시대든 예술을 할 때는 어떻게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가 하는 중요한 문제가 있었죠. 어떤 사회에선 예술가들이 전적으로 돈을 벌 수 없더라도 제의를 위하여 예술을 하고, 이들에게 먹을 것을 누군가 공양하듯 줄 수 있었겠죠. 남방 불교의 스님들이 식사를 제공받았듯이요. 고대엔 일하는 것을 수행과 섞이지 않도록 구분하는 분위기도 있었다고 하니까요. 탁발승은 먹을 것을 공양하고 그때마다 끼니를 해결했잖아요.

하지만 이런 경우는 참 예외적이죠. 그 뒤로는 스님들도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는 정신으로 절에서 그 절의 끼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사도 짓고 그랬으니까요. 모든 게 일종의 삶을 지나가는 수행이었죠.


베토벤이 살던 시절에는 더욱 더 그랬죠. 베토벤은 귀족에게 눌리지 않으려던 첫 번째 낭만주의의 천재라고도 하던데, 그 말이 적절한지 잘 모르지만, 그가 영웅적인 이미지, 불멸의 천재 이미지로 그려진 건 사실이죠. 우리가 기억하는 초상화의 베토벤은 근엄하고 비범해보여요. 그게 사실 그의 진짜 모습이라기보다는 약간 미화된 모습이라고도 하던데, 그거야 직접 대면해 본 적이 없으니 제가 뭐라고 하긴 어렵죠.

그런 견해에 대해 언젠가 책에서 읽은 적 있는데,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그가 귀족에게 휘둘리지 않으려 했다는 점이에요. 그가 괴테와 같은 시대를 살면서, 음악을 찬양하던 괴테와 거리를 둔 것도 괴테가 귀족에게 좀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라고도 하던데, 그들의 마음이야 정확히 알 수는 없고, 둘이 꼭 만나야만 한다고 법으로 정해둔 것도 아니지만, 이 일화에도 귀족이 끼어 있어요. 당시에는 귀족의 후원이 중요했죠. 또 알만큼 일류 예술가들이라면 파가니니나 헨델처럼 영국부터 이탈리아까지 순회공연을 하면서 경제적인 성공을 거두거나, 아니면 예술 애호가인 왕이나 귀족에게 고용되어 후원을 받으며 일을 해주는 것이었죠. 메세나의 전통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때부터 있었죠. 그렇게 일류 예술가를 알아보고 후원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문화적 취향의 우수함을 알리는 것도 상류층에게는 미덕이었어요.


순수한 후원의 개념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신들의 파티에 사람들을 불러놓고, 어떤 존재들이 자신들을 위해 일하는지 자랑하려는 용도였더라도 말이죠. 또 당시엔 악보로 놓고 음악을 연주해야 하는데, 아무리 귀족 딸이 음악을 체계적으로 배웠어도, 무엇이든 최고로만 즐기는 사람들이 만족했을 리 없죠. 교양을 위해 서로 사교 모임에서 감상을 해주었어도 결국엔 유럽 최고의 예술가들에게 지도를 받고자 했을 거예요. 매일 자기 집에서 그런 일급 연주자들이 최고의 연주를 들려줄 수 있다면 더없이 좋았겠죠. 왕이나 공작 정도의 계급이라면 가능했겠죠?

지금처럼 자본주의 시스템이 확고하지 않을 때였고, 클래식을 공연장에 가서 들을 만한 사람들이 한정되었다면, 악보 수입과 공연 수입만으로 먹고 살 수 있을 행운아는 그리 많지 않았다고 봐야죠. 영국처럼 공연 문화가 발달하여 셰익스피어 연극이 지속적으로 상연되고, 바로크 음악이 무대에 상시로 오르던 곳이라면 헨델 같은 거장도 찾아가서 귀족에게 덜 의지하는 삶을 사는 것에 성공할 수도 있지만, 모두에게 해당되기는 어렵죠. 결국 직장을 찾아야 했죠. 예술만 해도 예술로 돈을 벌 수 있게 해주는 곳이었죠.


이럴 때 귀족의 취향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예술을 하려는 것, 바로 그 지점에 베토벤이 있어요. 그게 바로 혁명을 꿈꾸던 야심찬 몽상이었다고 해야 할까요? 영웅을 꿈꾸고, 신으로부터 아직 멀지 않았던 정서적 수준에서 생각하기 좋을 선택받은 초인들. 그들은 감히 세상을 뒤집어엎을 수 있다고 몽상한 것일지도 몰라요. 시기적으로도 그랬죠.

프랑스 혁명으로 1789년부터 역사는 소용돌이 치고 1800년대에 혁명이 많았죠. 귀족들과 왕은 과거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 온갖 술수를 부렸고요. 예술가라면 그러한 역사 한복판에서 자기만의 절대 경지를 확립하고 절대 자유를 얻고자 하면서 엘리트 시민으로서 자기만의 위상을 고민하지 않았을까요? 어찌 보면 지금도 반복되는 고민이잖아요. 이거.

대중의 취향에 연연하지 않고 예술적 흐름을 따라가 자기의 개성을 확립하려는 욕구 같은 거요. 그때는 예술가를 고용한 귀족이었다면, 지금은 그 역할을 대중이 맡을 뿐이죠. 대중의 후원금이란 사실 판매량을 의미하는 거고요. 그걸 체계적으로 지원해주는 시스템은 20세기에 이르러서 축음기와 음반이 상업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것이 증명된 1900~1920년대를 출발 지점으로 볼 수 있을 거고요.


말하자면 19세기의 시스템에선 꼭 자본주의적으로 천재란 이미지를 팔아먹을 상황은 아니었죠. 엄청나게 유명한 배우도 있고 그래서 지금의 풍경이 그때도 어느 정도 스며 있지만, 전 세계적으로 견고하게 문화 산업이 발달해있지는 않았어요. 지금처럼 잘만 히트하면 천문학적인 부를 축적할 수 있었을지 궁금하기는 해요. 세계적인 팝스타가 이혼 소송에 들 2천억 원쯤의 위자료에 대해서 북미 투어 한 번으로 마련할 수 있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 입이 벌어졌는데, 그런 팝스타가 한둘이 아니죠. 지금은.

또 고급예술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어서 대중적으로 성공한 예술에서 천재란 말이 어울리려고 해도 1세기쯤은 지나야 하죠. 우리나라에서는 1950년대 지식인들이 트로트를 들으며 고뇌한다는 발상은 아무래도 어색했어요. 그때 음악다방에서 틀어주는 음악들은 클래식이었죠. 그 정도를 들으면서 파리 유학 시절을 떠올려야 뭔가 있어 보이죠. 19세기였으면 말할 나위 없죠.


그만큼 아직은 대중적으로 히트를 친다는 건 밥벌이가 가능해진다는 것이지, 자본에 장악된 상태는 아니었다고 봐요.

천재라든지 예술가라고 스스로를 규정한 사람들이라면 아무래도 예술적 성취와 고결한 삶의 실현을 궁극의 이상으로 삼았겠죠. 엘리트의 관점에서 고급예술 종사자를 특별하게 여기는 분위기는 여전했어요. 전문가들끼리 서로를 천재로 인정해주는 순간, 그렇게 특별한 체계 속에서 좋은 평가를 끌어내게 된다면, 귀족들의 후원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지겠죠. 당대에 일정 수준에 오르고 천재로 각광받으면 후원을 받는 데에 어려움이 없었겠죠. 후원하겠다는 귀족은 많을 테니까요.

드뷔시를 후원했던 러시아의 귀부인이었던 폰 메크 부인이었나요? 그녀가 약 15년 정도를 차이코프스키에게 후원했다고 하더군요. 편지로만 소통하면서요. 독특한 팬팔 일화죠. 스타와 팬의 15년 우정에 관해선 첫 손가락으로 꼽을 만한 일화라고도 할까요? 부인은 차이코프스키에게 고급 공무원이 받는 연봉을 훨씬 상회하는 후원금, 세 배 정도 되는 금액이었다고 하던데, 그 액수는 조금씩 다르게 보기도 하지만, 어쨌든 공무원보다 후한 보상을 받았다는 건 일치하죠. 약 6천 루블의 거액을 해마다 보내주기도 했다지요.

그런 후원은 당시 유럽에선 교양 같은 것이었나 봐요. 천재를 알아보고 그들의 재능을 꽃피워주는 것 말이에요.


그런 행운아들은 자신들이 고급 예술을 한다는 것으로, 명분을 얻기도 해서 반드시 대중에서 선택받아야 하는 시장 논리에 끌려들어가지 않을 순 있었어요. 천재란 범접하기 어려운 존재, 대중을 넘어서는 존재, 인간으로서 신의 비밀을 알아채는 존재 같은 거였으니까요. 그런 존재는 마땅히 그러한 신성한 작업을 위해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고 해야 할까요? 때로는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오만한 뻔뻔함 정도는 갖추어야 했을까요? 맑스가 앵겔스에게 돈을 달라고 할 때의 맡겨둔 찾는 사람마냥 당당했다는 일화처럼요. 그런 지원을 받더라도 감사히 여기지도 않을 자세, 직업인으로 대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하여 진리를 밝히는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그들은 그 정도의 담대함으로 예술가를 위한 혁명을 꿈꾸었다고 해야 할까요?

어쩌면 그들도 외부에만 그렇게 각인될 뿐, 실제로 후원자들 앞에서 을의 처지로 쩔쩔 매었을 수도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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