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동호 & 천재론2.1
[목차: 천재론]
◑ 1부. 부자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 천재를 유형별로 분류하는 세 가지 방식
♬ 천재는 홀로 태어나는가?
♬ 자본주의와 천재
◑ 2부. 창의적 도전과 보상 체계
♬ 인정 욕구와 눈치 보기
♬ 정당한 보상과 문화적 토양
♬ 천재의 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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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동호: 내면화된 자본주의 논리, 극복해야 할 이유를 잊었다
자본주의 시대에 부자는 누구나 부러워하죠. 부자라도 상민이라면 계급적 한계로 결핍이라는 걸 말할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났죠. 부자는 더 부유해지길 원해요. 족보를 살 필요 없죠. 그 대신 필요하다면 다른 이들이 키워온 브랜드 자산을 사들이기는 하고요. 그런 과정에서 천재란 브랜드도 활용하지요.
천재들은 부자에게 고용되어 자신들도 그만한 금전적 보상을 받아요. 마땅히 유명해진 몇몇 천재들은 부자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윤색되어 부자에게 기여하는 거고요. 처음 인터뷰 때였나요? “부자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라는 낙서를 남겼다고 했는데, 정말 그런 시대예요. 사실 이런 시대엔 부자가 천재도 고용하기 마련이고, 실력자들이 다 자본가 발아래에 무릎 꿇는데, 굳이 진짜 불편한 천재가 필요할까요?
보편적 주류에서 탈주해버린 천재라면 다루기도 힘들죠. 천재가 되려고 해도 부자가 원하는 능력을 지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에요. 죽은 천재라면 그 스토리를 통하여 환골탈태시켜 자본주의에 적합한 ‘이해받지 못한 불우한 천재’로 만들어버리고요. 죽은 정몽주가 산 정도전보다 편리하죠. 체제를 만든 건 정도전이고 그것에 반기를 든 것은 정몽주인데도 말이에요. 죽은 존재는 말이 없으니까, 위험함조차 패션이 되죠. 체 게바라처럼요.
이때에 이르고 나니 자본주의 시스템은 더욱 견고해지고, 바깥은 상상할 수 없어요. 승리자들을 통하여 그들의 불공정한 판은 더더욱 체계에 내재화되고 말아요. 영화 <기생충>을 보면 사실 근본적인 양극화 현상을 직감하지 못하고, 사장에 대해선 경의를 표하고 마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연출되잖아요. 그리고 마치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밥그릇 싸움을 하듯 싸우고, 정작 곱게 자라 자신의 위치 자체가 남들을 밟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상류 계급은 그다지 악한 모습을 띠지도 않고, 어리바리하기까지 해요. 그들이 세상의 작동구조를 알았다면, 누군가의 피로 올라선 뒤 몇 세대가 지나서 자신들이 있었다는 것, 그렇게 스스로 교양이 철철 넘쳐흐른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물론 영화는 여기까지 보여주지 않아요. 그저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에 처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요?
아직 예전 생각,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을 알던 시절의 추억, 아직은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연대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 혁명의 세대라면, 이렇게 변질된 채 저열하기까지 한 모습으로 묘사된 <기생충>의 주인공들을 통해 전망 없고 출구 없는 상황을 합리화한 것 같아 보이고, 오히려 피지배층을 비난하는 것 같다며 불편해하기도 하더군요. ‘저러니 저렇게 사는 게 마땅하다’는 식으로 묘사했다는 거죠. 그런 식으로 영화를 보는 감상자 자신의 모습을 비난하는 것 같다며 불편했다더군요.
어떤 분은 모든 체제, 특히 자본주의가 사람들 마음속에 내면화되고 그 외에는 어떤 혁명적 바람도 망상 취급 받는 시절이 도래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했고요. 그런 시대엔 계급의 우위가 곧 도덕의 우위처럼 그려지기도 하는데, 자본주의도 그런 시기로 진입했다고 말했죠. 그걸 블랙코미디로 설득력 있게 보여준 영화가 <기생충>이라며 상찬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이런 시절에는 제스처에 불과하더라도 거대 기업에 저항하는 예술 자체가 위축되는 것 같아요. 록이 그나마 겉으로라도 자본주의 논리에 저항하는 척이라도 했는데, 요즘 인기 있는 장르의 거대한 흐름은 자본의 논리에 순응하는 편이죠.
그나마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제기라는 맥락에서 힙합은 록의 저항을 수용하는 것 같지만, 자본주의적 성공으로 능력 있는 흑인이 세상에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이미지로 떠오르는 장르도 힙합이거든요. 제게는 그래요. 힙합이 낡은 록 정신, 비대해진 록 정신을 혁파하고 있으며, 실험적인 기여도 적지 않지만, 자본의 논리를 부수고 있는가 하는 지점에선 의문 부호를 붙이죠. 상황이 이러다 보니, 최소한 바깥을 몽상하는 척이라도 하던 과거의 흐름마저 이제는 사라진 게 아닐까 싶은 시절로 접어드는 것 같아요.
그리고 어쩌면 이때야말로 아티스트로선 새로운 영토를 발견할 시점이라는 생각마저 들어요. 물론 유의미한 무브먼트가 일어나기 전에는 미친 짓으로 보이겠죠. 지금은 기업의 논리가 더욱 견고해졌고 천재나 전사보단 기업의 큐레이팅에 더 중요한 역할이 있는 것 같으니까요. 그럼에도 분명 누군가는 유튜브 등을 통하여 새롭게 틈새를 발굴하려 시도할 거예요. 또 세상에 균열을 내려는, 무모하되 의미 있는 행동을 하게 될 수도 있죠. 뱅크시처럼요. 아직은 꿈꾸기를 포기하지 않은 용감한 몽상가들이 여전히 있을까요? 있을 거라 믿어요.
하지만 아직은 젊은 세대가 보수화되는 현상을 겪기도 하는데, 단순히 정치적인 것을 떠나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상상을 꺼리는 것 같아요. 계급 사회가 견고해졌을 때 그 이상을 상상해보았자 손해나는 결말만 떠오르면서 그 논리를 내면화하는데, 이길 수 없다면 강자의 편에 서는 것이라고 해야겠죠. 마치 마름이 되는 편, 뱀의 머리보다는 용의 꼬리라도 되었을 때 먹고 살기 편하다면 사람들은 아무도 함부로 모험을 하려 하지 않겠죠. 그 결말을 아니까요. 성공한 사람이 점점 보이지 않으면 밖으로 나아가 보기도 전에, 그곳에 끔찍한 괴물이 기다릴 것이란 단정을 해버리죠.
그렇게 모두가 당대에 비범해보이는 수재나 천재가 되기를 바라지만, 위험해보이거나 하찮아보일 도전을 감수할 리 없는 거죠. 정신 나간 짓이니까요. 적당히 보편적 주류를 수용하고, 테크닉의 면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 사회적 존경을 받는 것만 꿈꾸죠. 무엇보다 부자를 꿈꾸죠. 사실 천재란 불필요해져요. 부자가 된다면. 그래서 건물주를 ‘갓물주’라 하며 과학자나 대통령보다 그럴 듯하게 들리는 시절을 맞이했죠.
자본주의 초기에는 그래도 자본주의 바깥을 상상할 여력은 남았었죠. 지금은 공상이라 치부하지만, 그때는 과단성 있는 모험이라고 상찬받기도 했죠. 비록 초기부터 조금씩 천재의 명성이 모양새가 빠졌지만요. 17~18세기쯤 신의 명성을 가로채서는 인간의 능력으로 세상을 진보로 이끌 개념의 중심에서 천재란 상찬이 쓰였다면, 또 그렇게 귀족이란 구태한 존재로부터 인간의 능동성과 고결함이란 미덕을 빼앗아 왔지만, 이제는 부자에게 세상의 성공적 롤모델을 빼앗긴 건 맞으니까요.
그럼에도 아직은 천재는 세상을 뒤엎을 야망이 스민 개념이긴 했어요. 그렇게 혁명이란 이름으로 관습을 거역하여 역설적으로 자신의 명성을 획득하는 쿠데타적인 인물이었는데, 이제는 혁명이란 옛 이름을 적당히 두르고 부를 쌓는 존재가 되고 말았어요. 진정한 의미로는 혁명의 시절을 생각하기 어렵고, 자본은 아주 강력하게 많은 문화적 아이디어를 포착해내죠. 그리고 철저하게 이윤으로 그 우열을 가리는 거고요. 천재는 지워지고 부자만 있어도 무방하다고 해야겠죠. 천재란 일종의 대용품이라고 해야 할까요? 더는 자본주의 정신의 피식민 상태를 넘어서지 못한 채 그 너머를 꿈꾸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그런 대용품이요. 부자라면 더는 부러워하지 않을 대용품이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