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타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지키며 공존하는 다양한 소집단

[3.1]희정 & 천재론3.1

by 희원이

[목차: 천재론]

◑ 1부. 부자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 천재를 유형별로 분류하는 세 가지 방식

♬ 천재는 홀로 태어나는가?

♬ 자본주의와 천재

◑ 2부. 창의적 도전과 보상 체계

♬ 인정 욕구와 눈치 보기

♬ 정당한 보상과 문화적 토양

♬ 천재의 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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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희정: 배타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지키며 공존하는 다양한 소집단

각자가 스스로 바로 서면 최고지만, 실제로 온전히 개인 스스로 있기란 쉽지 않아요. 우리는 사회인이니까요. 그렇다면 사회에서 속하되, 자신이 조금 더 자신에 가까운 걸 이해해주는 수많은 소집단이 공존한다면 조금은 낫지 않을까 싶었어요. 나이대별로 무언가를 강요하는 게 아니라, 그 시기에 뜻하지 않은 취향을 지녔을 때 바깥에서 그것을 이해해주는 것과, 그 집단 안에 속한 채 서로를 이해해주는 것과는 느낌이 다를 거예요. 동료는 늘 필요한 법이죠. 모두가 서로를 존중하는 노력을 하면서도, 진심으로 서로를 이해하는 동료와의 연대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죠. 그러면 당장 빠르게 문화가 개방적으로 변하지 않더라도 서로 소속감을 지니며 더 능동적으로 상황을 대면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한 소집단이 엄청 다양하다면, 소집단 안에서 막상 경험해보니 마찰이 있을 때 더 잘 맞는 소집단에 새롭게 소속될 가능성도 생기는 거죠.

창의성이란 덕목도 바로 이러한 다양한 분화 가운데 그 틈새에서 피워나는 꽃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 꽃을 천재라고도 부르죠. 사실 그것을 위해 수많은 자양분이 필요하고, 함께하는 꽃들의 밀집 속에서 생존 가능성도 높아지고요.


이때 민규 씨가 말한 것처럼 경제적 요건을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미국이나 중국처럼 굉장한 인구가 있다면 더없이 좋을 거예요. 특히 미국의 경우 작은 분야에서도 나름대로 열심히 해서 두각을 나타낼 경우 먹고 살 만한 수준의 수요층이 확보되어 있잖아요. 이건 중국도 그렇고요. 아직 문화적으로 가로막힌 감이 있어서 그렇지만, 민주적으로 다양성이 확보된다면 급속도로 팽창할 문화 시장이기도 해요. 이미 가진 것에다가 새로운 아이디어까지 더해지고, 민주적으로 실질 구매력을 지닌 이들이 각자의 취향을 향유하기 위해 지갑을 연다면, 정말 농담이라 했던 ‘숟가락 아티스트’라도 태어날지 몰라요. 네, 중국에선 숟가락 하나만 제대로 잘 만들어도 평생 먹고 살 거라는 말을 했었잖아요. (웃음)

한국에선 시장 규모가 작다 보니 재즈에서 기라성 같은 분들도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하곤 하죠. 실력적으로는 어디 가도 빠지지 않았지만 몇몇 인기 장르를 하지 않으면 우리나라에선 그만한 대가를 감수해야 했던 거예요. 그러다 보니 메탈리카도 우리나라 홍대에서 활동했다면 15평 아파트를 마련할 수 있는지를 걱정해야 한다는 자조 섞인 농담도 돌았던 거고요. 아무도 듣지 않는 장르에선 생계를 걱정해야 할 만큼 수요층이 적으니까요.

그래서 결국 다원화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세계적으로 선도할 수만 있다면 이제는 안정적인 인터넷 유통망을 통해서 세계를 시장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게 증명되었죠. 그런 점에서 영국이 미국 음악시장을 발판으로 삼았듯, 우리도 더 다양하고 심도 깊은 음악으로 세계를 선도할 환경이 조성되었다고 생각해요. 이건 비단 음악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고요. 내수시장만큼의 안정성은 떨어지더라도, 다원화를 심대하게 막아설 만큼 치명적이지 않다고 보고요.

이런 상황에서 제도적인 지원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중앙 부처의 관점에서 사회 곳곳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가치를 시혜적으로 수용해주길 기다리기보다는, 그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우리만의 리그를 창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겠죠. 실제로 오랜 시일 점진적으로 그러한 흐름을 형성해나가고 있고요. 과거에도 당연히 있었지만, 미비점이 있었는데 그게 이제는 만만치 않은 수준으로 올라온 경우들이 발견된다는 의미예요.


예를 들어 SF문학을 볼게요. 과거에 완고할 정도로 자기 성벽을 확실히 쌓은 채 순수문학의 길을 강조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대놓고 배제하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그 안으로 진입하지 않으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상황이 있었어요. 지금은 그나마 나아지긴 했고, 문학의 메이저 출판사에서도 SF문학에 관대해졌죠. 물론 에세이도 그런데, 어디까지나 상업적인 고려에 따른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죠. 에세이든 SF든 체계적인 비평 이론을 구축하는 방향성을 제시하지도 않고, 문학상으로 선순환 구조를 끌어내는 것에도 열성적이지 않죠. 여전히 이 장르에서는 각자도생해야 하지만 그래도 과거에 비해서는 비교적 문호가 넓어졌다고 하는 편이 맞아요.

여전히 시와 순수소설이 강고하게 미학적 가치를 증명하는 장르로 자리잡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이걸 탓할 수는 없어요. 물론 이걸 비판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저로선 어차피 자기가 구축한 것을 갑자기 뒤집거나 소화도 못할 정도로 넓은 영역을 관리하라는 것도 현실적이지 않아요.


어쨌든 최근에 SF문학에서 그동안 대중이 인지하지 못했던 출판사나 잡지가 서서히 인지도를 구축해 나가는 것 같아요. 학계에서도 유명한 이론가나 비평가가 지원사격을 해주고 있을까요? 아, 네, 맞아요.

저는 어떤 분야가 수면 위로 드러나고 안정화되었다고 보는 징후를 세 가지로 보거든요. 우선 그것에 종사하는 동료가 충분히 있어야 해요. 서로 교류하면서 서로 인정해주는 사람들이요. 그리고 작품을 평가해주는 피드백 선순환 구조가 있어야 하죠. 당연히 그들이 활동할 무대와 지면이 보장되는 거겠고요. 그것에 대한 평가 체계도 고도화될수록 좋다는 거죠. 무엇보다도 그들이 생산해내는 작품을 향유해줄 수요층이 충분해야죠. 창작자들이 생활이 가능할 정도가 될수록 그 씬은 안정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봐요.

그런데 비평 집단이 탄생하려면 그 장르의 미학적 가치가 아주 탁월해서, 기존의 학자들이 유입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심리적 텃세라고 해야 할까요? 그러한 경우를 기대하기란 어려울 때가 많아요. 남의 선의보단 우리 스스로 바로 서야 한다고 했었죠. 결국 해당 분야의 작품을 오랫동안 충실히 소비했던 수요층들이자 키드였던 존재들이 성장해서 비평 집단으로 성장하는 시간을 견뎌야 할 때가 많아요. 그즈음의 시간을 견뎌내면서 수요층이 비평 집단으로 성장하고 생산자와 피드백이 충실해진다면, 이 집단은 비로소 안정된 거라 보죠. 그러고도 오래도록 성과를 증명해내는 시간을 버티면, 비로소 중앙에서 관심을 지닌다고 해야 할까요? 재즈도 그랬고, 록도 그랬고, 힙합도 그랬어요. 갑자기 한두 명이 잘해서 대중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고,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수요층도 보장해주고, 비평도 해주는 인력을 배치해주고 하는 게 아니란 말이죠.

타집단에 관대하거나 세부적인 흐름에 일일이 신경써주는 기득권은 드물죠. 수면 위로 드러나서 무시할 수 없는 흐름과 몸집을 키우는 것, 그게 중요해요. 이때 공격적으로 싹부터 자르지 말고,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국가에서 약간의 지원을 해주는 시스템이 마련되었다면 금상첨화겠죠. 많이도 안 바라요. 약간이면 되죠.


그런 선순환 구조가 구축되어 있다면, 그래미의 그 많은 시상 분야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다양한 장르의 가치가 뿌리내리겠죠. 블루스에 접근하는 법이 다르고, 클래식에 접근하는 법이 다르고, 록에 접근하는 게 또 다르잖아요. 그런 가치들이 자연스럽게 배타적으로 서로를 다치지 않게 하면서도 공존하겠죠. 그건 우리의 아이디어를 풍성하게 하는 보물창고와도 같죠.

바로 이런 흐름이 만들어졌을 때 그 각각의 집단에 있는 수많은 수재와 천재들 중에서도 극소수가 그 장르와 시기를 대표하는 천재로 호출되는 거죠. 동료들이 호출하는 천재, 그 집단의 마니아 집단이 호출하는 천재들이죠. 일종의 유기적 지식인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 집단의 가치를 내재화한 존재 중에서도 가장 압축적으로 그 장르를 대표할 만한 인물, 당연히 동료들까지 인정하는 실력파겠죠. 그런 존재가 보통 천재로 호출되는 거죠.

물론 약간 실력이 처지더라도, 그 소집단을 주류로 올려놓는 보편성의 사건을 일으킨 존재가 천재로 추앙받기도 하고요. 우리에겐 서태지가 이런 존재가 아닐까 싶어요. 우리 대중에게 댄스음악이라는 장르를 각인시켰으니까요. BTS 세대의 관점에서 세계 단위로 진출하여 K팝을 알린 입장에서 보면, 서태지는 선구자라고 불릴 수도 있겠죠. 세계 단위에선 아직 천재라고 하기엔 특출한 개성을 확보했던 것은 아니니까요. 어찌 보면 그런 명예까지 거머쥘 가능성이 있으면서, 동시에 부를 획득했던 서태지는 행운아인 것 같아요.


사실 한국에선 다양성을 대표하는, 그러니까 동료들이 호출하는 천재가 충분히 사회적으로 안정적으로 살아간다고 말하긴 어려워요. 수요층도 부족하고 과거의 추리소설가라든지, 다양한 마이너 장르의 창작자들이 활발하게 비평을 받으며 주류의 역사에 안착한다고 보긴 어렵거든요. 누군가 자기 시간을 쪼개서 덜 전문화된 방식으로 오타쿠적 작업을 하는 것이 중요한 상황이죠. 과거 일본에서 재즈 오타쿠들이 별의별 녹음반을 수집하여 아카이브를 구축했던 것처럼요.

하지만 세계적으로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조금 더 빠르게 다원화된 분야에서 다양한 가치를 대표하는 천재들이 호출되기를 바라죠. 그건 단순히 그들이 뛰어나다는 것에 경탄하고, 역시 엘리트가 중요하다는 식의 사고를 증명하는 건 아닐 거예요. 오히려 이런 식의 천재를 기대하는 과정에서, 천재가 민주 시민으로서 얼마나 다양한 가치의 향유를 열망하는지 보여주는 척도라고 해야 하겠죠. 흔히 오해하듯이 천재는 선택받은 엘리트라는 낭만주의적인 신화에서 벗어나, 민주주의의 척도인 다원주의의 정도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존재라고 할 수도 있을 거예요.

어떤 천재를 그리는지를 살펴보면, 그 사회의 수준이 어디쯤 와 있는지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천재를 원하시나요? 전 다양한 가치를 반영하는 작은 집단의 천재를 원해요. 작은 집단의 동료들이 쌓아온 성과를 결집하고 반영하는 존재. 동료들이 연대하여 호출하는 그런, 작은 천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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