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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원이 Mar 17. 2024

미디어비평: 코멘터리의 종류

칼럼

[목차: 바깥의 글쓰기]

♬ 인용글 활용: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 탁월한 편집: '국화와 칼'과 교양서적

♬ 인용: 교양서 저술 때 유의 사항

♬ 재즈문화사: 교양서 주제 선택 때 유의 사항

♬ 목차 타이핑: 교양서 집필 때 유의 사항

♬ 인용 표기법: 교양서 집필 때 유의 사항

♬ 지식놀이: 편집인용과 그 사례

♬ 놀이글: 혼융인융과 코멘터리

♬ 르포 일기 수집: 교양서를 쓸 시간이 없다면

♬ 미디어비평: 코멘터리의 종류

♬ 트위터에서 보았던 기법 두 가지

♬ SF: 전자책과 링크 기법

♬ 직장인 창작: 미니픽션과 에피소드

♬ 미니픽션

♬ 에세이, 글쓰기의 멀티플레이어

♬ 상호텍스트성: 링크가 너무 많다는 건

♬ 1인칭 문학: 픽션에세이와 사소설

♬ 매드무비와 팬뮤직: 매쉬업과 리믹스

♬ 성경의 글쓰기 방식





♬ 미디어비평: 코멘터리의 종류

시민기자가 있다면 코멘터리 작가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기록비평가라고 부른다. 일반적인 비평가와 다르게 형식주의적 비평에 더 매진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부르면서 정확히 경계를 나누었는데, 여기서는 그런 경계를 지웠다. 기법적으로 제한적인 정보를 두고 다양한 코멘터리를 붙이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을 코멘터리 작가로 통칭해도 무방하다. 아무래도 좋다.  

코멘터리 글쓰기는 짧은 글을 주로 쓰고, 그 글 역시 중심 정보에 철저하게 귀속되는 위성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그래서 창의적인 자신의 글을 원하는 사람들이 볼 때는 중요도가 떨어지는 작업처럼 보일 수 있겠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의식 있는 시민들이 정말 제대로 깨어나려면, 어쩌면 현실적으로 볼 때, 제한적인 정보에서 많은 의미를 찾아내는 훈련이 잘 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거저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매번 좋은 결과의 추세선을 그리지도 않는다. 때로는 지난하고 버겁고 위태롭다. 그러한 과정 뒤에야 장기적으로 점진적으로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고 보기에 큰 방향을 설정하고 인내심 있게 나아가야 한다. 잠깐의 부작용으로 수용자의 역량을 불신한다면 계속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영영 지금의 답보 상태에 머무를 것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제도적으로 미디어교육을 논술교육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여긴다. 미디어에서 생산하는 정보를 제대로 볼 줄 아는 안목만으로도, 민주시민의 측면에서 이미 기본적인 것의 많은 것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볼 때, 민주 시민이 할 수 있을 유력한 창작 방법으로는 이 코멘터리 작업과 함께 시민기자적인 취재가 있다. 두 방식은 쌍두마차다. 시민기자적인 작업으로 모르는 틈새 정보를 더 취재하고, 코멘터리 작업으로 제한된 정보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되새김질을 아주 많이 한다. 둘의 협업이야말로 온라인상에서 기대할 수 있는 최적의 조합 중 하나다.      


이러한 코멘터리 작업으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대상 정보, 대표적으로 기사를 앞에 두고, 그것에서 필요한 부분이든 전체적으로든 기사의 완성도부터 숨겨진 표현에 따른 균열을 감지하는 (기록비평가적인) 작업을 말한다. 지금도 알게 모르게 정말 많은 사람들이 하는 작업이다. 트위터가 생기면서 촌철살인의 댓글들이 달리게 되었는데, 그런 것도 이 작업의 일종이다. 나 역시 처음에 이걸 했던 순간이 기억난다. 그때는 의식적이지 않았고, 기사가 담고 있는 아이러니를 포착하는 게 재미있었을 뿐이다. 유머러스 방식으로 포착하기도 하고, 좀 빡빡한 방식으로 건조하게 비평적으로 진행하기도 한다.    


글 쓰는 이에 따라서는 진한 페이소스를 묻어나오게 할 수도 있겠다. 풍자적이고 비판적인 글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글 읽다 보면, 촌철살인의 코먼터리들도 많듯이. 짧지만 날카롭고 단단한 방식의 글, 꼭 시나 미니픽션이 아니더라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상대의 글에 딴죽을 걸면서 지엽적인 부분에서 조롱하는 글이 될 수 있어서, 그 점을 늘 조심하려고 한다. 무엇보다도 이 방식으로는 저작권 위배 요소가 있어서 쉽사리 출판하기도 어렵고, 진지한 작업으로 인식되지 않을 수 있다. 아예 비평가처럼 그 비평으로 중심점을 옮기면서 길게 쓰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순수한 코멘터리 작업은 중심 정보의 위성쯤 된다. (만일 자신의 비평적 창작 쪽으로 중심점을 옮기면, 아무래도 관련 텍스트에 얽매이지 않게 되면서, 인용 비중이 줄어든다.)

그런데 이러한 글쓰기를 유지하는 것으로, 출판물로는 강준만의 <정치적 글쓰기의 윤리>을 떠올린다. 이때 일반적으로는 인용 텍스트가 너무 많다면 부담을 느낀다. 기사라면 저작권 이용 문제로 부담을 느낄 수 있다. 어디까지가 비평의 공익적인 목적인지 말하기도 애매하다. 결국 그 인용 텍스트를 허용 범위까지 최대한 줄이거나 변형하거나 아예 지우는 방식으로 출판을 염두에 둘 수는 있다.      


즉 둘째, 중심 지점을 지우고는 그것을 외부에서 간략히 소개하거나, 글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할 수 있다. 그러고는 그것에 관해 다양한 방식으로 코멘터리를 펼칠 수 있다. 다만, 이럴 경우, 그냥 일기, 에세이로 보아도 좋다. 코멘터리의 경우 분명하게 중심 정보만의 표현 등등이 살아있게 되면서, 생기는 상호작용이 있는데, 그건 탈락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하나는 살아 있을 것이다. 만일 일관되게 어떤 정보를 수집하면서 그것에 관해 촌평하면, 그것을 통해서 위성이라고 해도 만만찮은 사유의 집적물이 생길 수 있다. 그렇기에 의식적으로 코멘터리 작업을 하고, 그 짧은 글이 단단하다면 그 자체로 가치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가치를 얻지 못한다면, 그냥 블로그에 놓아두어도 좋다. 블로그 자체로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기록저장소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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