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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원이 Feb 16. 2024

예상치 못한 부재와 온-오프라인

산문


영화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를 여러 번 보고, 많이 울었다. 감독이 음악을 절제해서 사용하면서 주변 소음을 잘 활용한다고 여겨서도 좋았고, 사랑이야기 안에 죽음이라는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당시) 충무로의 신인감독이 세련되게 담아냈다는 게 흥미로웠다. 지금도 허진호 감독의 영화들은 좋아한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면은 기억에서 희미해졌다. 다만 영화는 여전히 좋았고, 그때와는 달리 두 장면이 특히 가슴을 끌었다. 하나는 시한부선고를 받은 주인공이 아버지를 위해서 텔레비전 작동법과 사진기 사용법을 메모해놓은 장면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가 죽을 줄도 모르고 사진관 앞에서 서성이다가 끝내 화가 나 유리창을 깨는 장면이 그랬다.

죽음을 앞둔 그가 자신이 없을 때 아버지가 겪을 시행착오들을 걱정하며, 자신의 삶을 정리해 나가는 그 단출함이 더욱 와 닿았다. 빈소의 풍경에서 익숙한 주요 소재가 고스톱이요, 육개장이라 한다면, 그것은 그가 사진에 담기고 사라지는 사건과 제법 어울렸다.

그런가 하면 심은하의 행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 그는 애인이 아니다. 그렇다고 애인이 아니라고 단정 짓고 싶지는 않은 존재다. 그런 그가 어느 날부턴가 가게 문을 걸어 잠그고 나타나지 않는다. 직접 가서 물어볼 방법도 모르고 용기도 나지 않는다. 게다가 물어볼 처지라고 하기도 그렇다. 그래서 심은하는 그의 안부를 걱정하고 때때로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는데도 별다른 행동도 하지 못하고 버릇처럼 그 길을 지나간다.

그렇다고 그를 욕할 수도 없다. 죽음을 앞두고 그녀와 사귈 수도 없고, 그렇게 말하기도 미안하다. 또한 괜히 그런 말을 꺼낼 정도의 사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다. 그래서 그는 별 말 하지 않고 조금은 더 알고 싶었던 사람을 놔두고 죽는다. 만일 그녀가 좋아하는 것을 정말로 알았다면, (그가 알았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냥 내버려두는 편이 아픈 추억을 남기지 않는 방법이라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는 떠났고, 이를 알지 못한 채 화가 난 여자는 돌로 사진관의 쇼윈도를 깬다. 아마도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분풀이였을 것이다.

사랑은 모호했고, 죽음은 단출했다.

 

갑자기 이 영화가 떠올랐던 것은 새로운 서비스에 대한 기사를 보았기 때문이다. 기사에는 ‘일정 기간 블로그에 자료가 업데이트되지 않으면, 그가 지정한 사람에게 블로그의 주소를 알리는 메일을 보내는’ 서비스가 생겼다는 소식이 담겨 있었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허무하게 잊히기보다는 그들이 남긴 것을 누군가 기억해주길 바란다. 그렇기에 관련 서비스가 생기지 않을까 추측했는데, 얼마 전에 그런 걱정을 하는 사람을 위한 서비스가 나온 것이다. 지금도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 블로그와 미니홈피가 무수하게 널려있다. 1년 가까이 업데이트가 되질 않아 결국 들어가지 않게 되는 곳도 생기곤 한다. 그럴 때마다 주인이 바쁘다고 여겨버리고 말지만, 가끔은 좀 쓸쓸해보이던 블로그의 글을 접하다가 더는 접하지 못하게 될 경우, 그 사람 지금 어떤 마음일까 상상해보곤 한다.

만일 우울증을 앓던 어떤 사람이 죽게 된다면, 주변 사람들이 그 혹은 그녀를 예를 다해 보내주겠지만, 인터넷에선 어떨까? 어쩌면 그 사람의 미니홈피 등은 유령처럼 남아 그 혹은 그녀의 부재를 인정치 않고 지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곳에 들르던 사람들은 주인이 바빠서 온라인 공간을 잊었다고만 여겨버릴 것이다. 그렇게 발길을 끊었다가 한참 후에 우연히 들어간 그곳은 여전히 있을 수도 있다. 무심코 그곳을 나오려다가 댓글이나 방명록에서 주인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 수도 있을 것이다. 그제야 그 사람이 아팠던 정도를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게 된다면 조금은 다행이다.

유사한 일을 겪었다. 평소에도 우울증을 앓는 것은 아닐까 의심은 했지만 인터넷으로 댓글을 주고받는 정도의 사이였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끼어들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죽은 것은 추정되는 어느 날 업데이트된 글에 평소보다도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고, 그 후로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그곳에 방문하지 않았다.

그런 후 우연히 들어간 곳에서 부재가 곧 죽음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묘하게 나 역시 연루된 것처럼 느꼈다. 문제의 그날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날짜를 더듬어 기억을 복기하기도 했다. 물론 엄밀히 말해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어쩐지 하고 싶었다. 그 곳의 쓸쓸함이 한동안 나를 매혹했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그토록 쓸쓸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일까? 나는 궁금했고, 그 궁금해 했던 만큼 미안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주인 없는 그곳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2009년(?)

자우림: 이틀 전에 죽은 그녀와의 채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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