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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원이 May 24. 2024

읽는 독자보다 쓰는 작가가 많은 시절

대안 출판(81~83F)

글쓰기 외전: 대안 출판


◑ 전체 원고 흐름 및 진도 상황

- 매거진 방식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물론 실제로 다양한 저자를 섭외하지는 않고 단독으로 작업하였습니다. 매거진에서 다양한 글에 다양한 필자가 있기 마련인데, 여기서는 다중 정체성의 다른 인물을 연기하는 것처럼 고흐 이미지를 배치하고 여러 스타일의 글과 함께 구성하였습니다. 픽션 매거진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매거진 놀이로도 부를 수 있을 텐데, 이 원고의 경우 전체 흐름에선 사실과 경험을 토대로 하되 종종 일관된 방향성을 띠되 원활한 개진을 위하여 허구적 설정을 삽입하였습니다. 대체로 경험적 정보로 이해하셔도 무방합니다.

- 내용 흐름을 보면, 전체적으로 다양한 출판 형식을 경험하고 몽상하면서 지식 생태계의 건강한 시민 참여적 기여를 위해 어떤 방식으로 출판을 대해야 하는지 잡담합니다. 그 과정에서 '온라인그라운드, 전자책, 종이책'을 살피게 됩니다.  

- 총 113프레임으로, 상황에 따라 약간 바뀔 수 있습니다. 현 발행글은 81~83프레임에 해당합니다.






◑ 일기: 읽는 독자보다 쓰는 작가가 많은 시절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작가가 되고자 하지만, 정작 출판계의 시장 상황은 안 좋다고 한다. 즉, 쓰고자 하는 사람은 많지만 읽는 사람은 없다는 의미다. 많이 읽어야 제대로 쓸 수 있음에도, 쓰려는 내용이 자기계발서나 경험에 한정되어 있고, 대개는 분야에서 명함이나 경력을 위한 것이거나, 가벼운 인정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그렇다면 굳이 다양한 분야의 책을 탐독할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그 때문인지 모르나, 여하튼 읽는 독자보다 쓰는 작가가 많은 시절이라는 말이 돈다.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을 저마다 쓰고 있는 셈이다. 스스로도 독서하지 않으면서 쓰기를 갈망하는 셈이다.

하지만 독서 인구가 늘지 않고, 책 쓰려는 사람만 늘어나는 상황을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는 편이다. 극단적으로는 책을 거의 읽지 않으면서 그래도 작가는 되고자 하는 것조차 나쁘지 않다. 이에 대해 세 가지 이유를 들겠다.

우선, 책을 명함으로 쓰려는 지적 스노비즘이지만, 책으로 자기 생각을 정리해 보려는 시도 자체는 나쁘지 않고, 그게 아무리 안 좋아 보이더라도, 그들이 책을 내지 않아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둘째, 그들이 책을 내지 않는다고 해서 독서 인구가 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것을 이미 즐기고 있고, 그것으로 자기를 어필할 수 없어서 문자라는 효율적인 수단을 택했을 뿐이다. 책을 쓰는 사람이 많아진다고 개탄할 게 아닌 셈이다. 진짜 원인을 모른 채 괜히 자기 밥그릇을 빼앗기는 것 같은 울분만 드러내는 것일 수 있다. 그들은 책을 내지 않아도, 다른 책을 읽지 않는다.

셋째, 그들이 낸 책 중에 만일 의미 있는 책이 제법 있다면, 기존의 방식대로 관례적인 절차를 밟지 않고 책을 냈다고 해서 이상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관성적인 기대에 대하여 균열을 내는 일이다. 기존의 책에서 발견할 수 없을 유의미한 가능성이 압도적인 출판 분량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굳이 막아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 점에서 ‘책을 쓰려는 사람만 많아지고(현상1) / 그럼에도 독서 인구가 늘지 않는다고(현상2)’ 비판하는 입장에 부정적인 편이다.

, 지적 스노비즘을 지닌 이들이 그것을 표출하려는 지점이 출판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잠재적 독자이면서, 미개척지로 보아야 한다. 그들은 애초에 글을 읽을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 지적 허영심 덕분에 문자에 붙들렸다. 오히려 이를 주목하고 그들이 더 글을 잘 쓸 수 있도록 비평하고, 그들에게 상을 주고, 그들이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책을 읽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적 스노비즘을 자극하는 것이 오히려 생산적이다.

둘째, 어차피 책을 읽지 않았을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왜 책을 읽지 않는가, 어째서 영화를 보고 게임을 하고 음악을 듣는가.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사실 책이 재미없기 때문이다. 꼭 말초적인 재미가 아니더라도, 뻔한 얘기로 고립된 방식에 대해 자성할 필요가 있다. 업계 관계자들이 자신에게 하는 질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어차피 독자가 될 사람이 아닐 사람들이, 지적 스노비즘 덕분에 문자 곁에서 표류하는 것이다.


셋째, 만일 괜찮은 내용이 수면 위로 드러난다면, 그동안 사실 그걸 막았던 건 아닐까. 기존의 편협한 관성에 갇혀서 출판업자들이 좋다고 믿는 어떤 지식을 수동적으로 독자가 소비해야 한다고 본 것은 아닐까. 독서 향유층의 확대를 넘어서 지식 생산자의 외연도 확대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소모적인 헛돎도 있어서 비효율적일 수 있지만, 마치 스페인이나 영국의 축구 시스템처럼 참여하는 축구 문화로 고급 축구팬을 양산했고, 실제로 꾸준히 축구 신성이 나오듯이, 시민 참여 저술 문화는 독서에도 이바지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독서 인구가 늘지 않고, 책 출판해서 명함으로 쓰려는 사람이 늘어나는 현상도, 어쨌든 좋은 현상이다.


“독서를 많이 하면서 책을 내려는 경우도 당연히 있을 수 있는데 이런 경우라면 이미 훌륭한 독자로 책을 잘 쓸 가능성도 높죠. 또 이미 독서인구로 잡혀 있을 것이고요. 그러니 특이 지점은 아니죠. 책을 많이 읽고 책을 쓰려는 경우니까요. 여기선 부정적인 의미의 책 출판을 염두에 두는 유형, 그러니까 독서를 하지 않으면서 책을 쓰고자 하는 경우에 집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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