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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양 Nov 20. 2021

끊어내다. 의지의 결여

인정하라.

세상으로 향하는 저 문을 그대는 열 용기가 없다는 사실을.

자물쇠도 걸려있지 않은 저 허름한 문을 박차고 나갈 자신이 없다는 사실을.

수치스러움을 감추고 온갖 핑계를 대며 허황과 반대의 곳으로 가기를 꺼린다는 사실을 인정하라.

좁디 좁은 감옥 가운데 홀로 앉아 세상을 비추는 창 하나로 연명하다보니 세상에 대한 거짓 선망이 생겼으리라. 

그대와 세상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물리적 요소는 오로지 그대의 목을 감고 있는 동아줄 하나, 내 피와 손톱을 희생하여 사력을 다해 끊어내면 그대는 세상이 품고 있는 공기에 안길 수 있다. 

그러나 그대가 가진 그 선망이 거짓이라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는지 그대는 조금도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성벽 안에서 적들의 치부를 건드리는 데 희열을 느끼는 수준에 머물고 있는 영혼이 해방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사치인가? 

그 동아줄이 끊어질 때 당신은 벗어날 수 있다. 

당신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당신은 스스로를 묶고 있는 줄이 끊어지지 않게 조심하고 있다

- 우리의 모순은 이러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

그 줄이 끊어지면 진짜 세상으로 나가게 될지도 모르니까.

스스로의 거짓됨과 나약함 그리고 극심한 죄책감 

- 이는 자신의 두려움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듯 하다 -

에서 벗어나기 위해 줄을 그대로 목에 감은 채 힘껏 바닥을 밀며 문을 향해 손을 뻗는다.

스스로 ‘나는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는 일종의 위안을 삼기 위해 이러한 합리화 형태의 행위들을 나열하는 것이다. 

이 모든 행동들이 그대의 정신이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대는 세상에 나갈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아니, 세상에 나가는 게 두려워 차라리 갇혀 죽기를 택했다는 것을.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점철된 현재의 상태가 느끼는 수치심을 덜어내기 위해 ‘행하였다’는 위안을 심는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똑같은 감정의 늪에 이러한 행동은 습관이 된다.

‘목줄을 끊어낸다’는 선택지는 일전에 사라졌고,

 이제는 이 안에서 어떻게 하면 가장 ‘영예로운’ 모습으로 스스로에게 인정받을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문을 향한 무모한 움직임에 의해 줄은 점점 목을 조여오고 피를 토하게 하며 끝내 마지막 숨결을 끝으로 영혼의 뿌리를 가져간다.

두려움에 압도당해 나약함의 지배에 응했고 그 어리석은 행동이 죽음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그대는 이게 진정한 ‘승리’라고 생각하는가?

그대의 시체는 여전히 감옥의 열린 문 바로 앞에 놓여있다.

세상과 한 걸음의 거리를 두고 그 자리에 쉬이 누워있다.

그대의 뼈가 가루가 되었을 때, 창을 넘어 들어온 바람이 그대를 태우고 세상으로 나갔다.

돌아본 그대는 그대가 죽음을 맞이했던 감옥과 정확히 동일한 모양의 무덤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느꼈는가?

죽음 그 이후의 시간에서 드디어 깨달았는가?

무엇을?

이제 삶이 없으니 더 이상 두려움도 없다. 이제 인정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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