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과거 회사를 떠나올 때, 친한 후배 몇 명과 선임들이 떠나려는 나를 붙잡았다. "어딜 가도 똑같아, 그냥 여기서 있으면서 경력을 쌓는 것도 나쁘지 않아." 나는 그 말을 뒤로하고 떠났다. 집 떠나면 고생한다고 했는가, 여러 고생들을 하면서 조금씩 나아가고 있지만 집을 떠나지 않았으면 이런 고생들이 있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후배들과 여전히 연락을 하고 가끔 만나는데, 만나게 되면 회사 욕이 절반 이상이다. "이 회사는 미래가 없어요. 어딜가더라도 여기보다는 좋을 것 같아요." 그때마다 나는 뻔하디 뻔한 조언을 해준다. "X야 지금 회사는 대기업의 자회사이면서, 사실 고생은 많이 하지만 이 업계에서 지금 하는 일보다 안정적인 것은 없어." 이 뻔하디 뻔한 대답을 들으면 그들은 늘 "제가 이런 거 하려고 그렇게 개고생 하면서 공부한 건 아니었는데..."라는 씁쓸한 대사를 뱉은 후 술잔을 기울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나는 웬만해서는 퇴사를 하지 말라고 권유한다. 내가 고생한 것도 잘 알고 있고,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 역시 세상을 겪어 보면서 이런저런 쓴맛도 봐야 성장을 하지만, 아직 거기서 배울게 많은데 벌써 나올 필요도 없거니와 내 자식들 같아서 또 힘든 꼴을 보기가 쉽지는 않다.
내가 나오기 전에만 해도 여건이 좋지는 않았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래도 나름 회사가 인간적으로 좋아지려는 분위기로 변하고 있었다. 직원들한테 어떤 회사가 100% 만족스럽겠냐만은, 그래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것은 좋은 징조로 느껴진다.
"야 인마, 그래도 나름 복지도 좋고 점점 퇴근도 빨라지고 좋아지고 있잖아. 더 좋아질 거야, 지금 거기가 배울게 많아서 더 어렵고 힘들어서 그래."라고 했지만 후배들은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다. 빠르게 성장만 해오는 시대를 살았고, 매년 매년 학년이 올라가는 시간을 살던 우리에게 사실 2~3년씩 정체된 움직임을 참기란 쉽지가 않은 법이다.
학교에서는 매년 학년이 오르고, 배우는 것도 다르고 위치도 시시각각 변한다. 후배들이 생기고, 학업의 깊이가 늘어나면서 많은 것들을 경험한다. 하지만, 회사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진급이 매년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하는 일이 매년 변하는 것도 아니다. 프로젝트가 들어가면 몇 개월에서 1년은 족히 걸리고, 업무가 다양하고 다이내믹하게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까, 이제 막 사회에 들어온 친구들은 답답해 죽으려고 한다. 딱 보아도 굉장히 오래된 시스템들인데, 절대 합리적인 프로세스도 아니고 그렇다고 권한이 주어지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목에 감긴 올가미처럼 점점 숨통이 막히는 것만 느끼게 된다.
하지만, 또 시간이 지나 보니까 그런 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세상이 빠르게 변한다고 하지만 그 무엇도 갑자기 변하는 것은 없었다. 꽃은 씨앗에서 바로 꽃이 되지 않는다. 땅 속에서 기나긴 기다림이 필요하고, 햇빛과 물을 섭취하면서 자신의 힘을 발산할 때를 기다리기 마련이다. 바로 꽃으로 되지도 않고 풀잎이 나고 꽃봉오리가 응축한 힘을 뿜어내면서 아름다운 꽃이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모두 꽃인데, 각자 다른 시기에 피어나는 꽃일 뿐이다. 지금 사회에 들어온 후배들에게는 답답하더라도 기다리면서 힘을 응축해두어야 한다. "도대체 언제쯤 괜찮아지는 거예요?"라고 묻는다면 "언젠가는 괜찮아지겠지"라고 답해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언젠가는 꼭 괜찮아진다는 희망을 안고 무엇이든지 열심히 한다면 당신이 길가에 핀 들꽃이라도 누군가는 그 가치를 알아봐 줄 것이다. 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