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02. 비라도 왔으면...
"안녕하세요."
회사에 들어서면서 마주치는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를 한다. 별일 없는 듯이 내 자리에 앉고 컴퓨터를 켠다. 컴퓨터가 부팅되기까지 달력을 한번 보고 스케줄을 정리하다가 눈길이 멈춰진다. 다른 사람들과의 저녁 약속이 있을 때는 늘 달력 하단에 이름을 적었다. '고등학교친구들 - 종로' 같은 내용들을 적어놓으면 사람들은 데이터 시대에 아날로그한 감성이라고 놀려댔다. 하지만, 너와의 약속이 있는 날에는 늘 이름없이 장소만 적어두었다. 어린아이처럼 소란스럽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크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무언가 어긋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강남'. 어제 날짜의 달력칸에 쓸쓸하게 적힌 두 글자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이제는 장소밖에 남지 않은 우리의 시간, 한동안은 장소만 적히지 않겠지. 씁쓸하고 공허한 마음이 마음 가득 차오른다.
'나도 참 뻔하네.'
이제와서 이별코스프레를 할 수도 없고, 갑자기 뛰쳐나가서 네 회사로 갈 수도 없다. 영화 속의 로멘틱한 장면들은 현실에서 실현될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있다. 그러지도 못하는 마음에 괜시리 길게 한숨을 뱉으면서 컴퓨터의 비밀번호를 누른다.
"대리님, 무슨일있어요? 왜 아침부터 한숨이에요?"
"아, 아직도 주말이 아니라는 생각에 아침부터 우울하네요. 고마워요."
새로 들어온 인턴의 관심을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답변해준다. 겉은 웃고 있지만, 이런 대답을 하는 내가 조금 초라하다. 이게 뭐라고 왜 감추는지도 이해할 수 없지만, 본능적으로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면을 쓰는 것이 조금 더 편하다는 것을. 지금의 얼굴을 네가 본다면 만족해할까? 아니면 쓴 웃음을 지으며 헤어지길 잘했다고 생각을 할까. 오늘은 업무에 실수를 하지 않아야지. 오늘은 가장 아무런 날이지만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보여야하니까.
[우리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혹시나 했던 기대와는 다르게 핸드폰은 조용하다. 너를 제외한 모든 연락들이 울리지만, 정작 네 이름은 보이지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은 별일 아닌듯 또 그렇게 살아가겠지, 너와 나의 이별따위는 중요하지도 않은채로 말이야. 조금씩 이별이 확실해지는 기분이 든다. 어디서부터 지워야할까. 도대체 어디서부터 너를 지워내고 아무렇지 않은척 살아야할까. 사진첩에 가득 담긴 네 사진을 지워야할까. 아니면 혹시나 하는 기대로 지우지 말아야할까. 사실, 이제는 사진들을 지우는 것도 귀찮다. 앞으로도 더 몇번이나 지우고 몇번이나 새로운 사진들을 채워넣어야 하는 걸까. 이별에도 담담하게 지내는 것 이것이 정말 어른의 연애일까. 점점 마음을 감추는 것, 가면으로 나를 가두는 것이 정말 나일까. 너도 지금 나와 같은 모습으로 있을까.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해야할일을 다 마무리 하지 못하고 회사를 나왔다. 조금은 눅눅한 공기, 우산도 없는데 비라도 내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찌하지못할정도로 쏟아진다면 이 답답한 마음이 조금은 숨통이 틔일 것 같기도 한데. 하늘을 한번 쳐다보고 길을 걷는데 주머니에 진동이 울린다.
[오빠, 어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