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연애 소설 3

E03. 언제부터였을까

by 구콘

언제부터 사람에게 마음을 다주지 않게 되었을까. 언제 이후인지는 알겠지만 정확하게 누구부터 였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관계가 시작될 때마다 이상하게 상대와의 거리를 만들어 놓기 시작했다. 온전히 빠지지도 않고 온전히 멀어지지도 않는 회색공간. 그 공간을 왔다갔다 하면서 사랑이라는 것을 읊었다. 이런게 사랑일까 싶었지만 어느날 깨달은 것이 있었다. 상대방도 회색공간이 있다는 것을, 거기서 나오기도 하고 숨기도 한다는 것을. 그걸 알았다고해서 마음을 쉽게 편히 가지면 안됬던 것인데도 나는 편하게 마음을 먹었던 것 같다. 또한, 회색공간은 담배와 같아서 손에 쥔 순간 놓을 수도 없다. 그 공간이 주는 편안함, 도망칠 여유가 있는 마음이 어딘지 모르게 안정적인 기분을 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메세지 본거 다 알아.]

어떻게 해야할까. 답장을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을 하면서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데 또다시 메세지 알람이 떴다. 어쩌면 너는 내가 널 아는 것보다 더 많이 나를 아는구나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담담할 수 있는 거겠지...

[이제 퇴근했어. 집에 가는길이야.]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보내니까 바로 전화가 울렸다. 받아야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전화를 받았다. 하루종일 아닌척 기다린 것은 나인데, 막상 현실이 되니까 이렇게 도망칠생각만 하다니... 참 뻔뻔하고 초라한 듯한 기분이 가슴을 때린다.

"여보세요?"

"오늘 약속없지, 잠깐 보자. 우리 처음 만난 파스타집 알지? 거기로와. 올 때까지 기다릴테니까. 꼭 와"

대답도 듣지 않고 끊어진 전화를 보면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떡해야하나.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지금 가면 너는 내게 무슨말을 할까. 화를 낼까? 아니면 다시 시작해보자고 할까? 지금 전화를 끊은 말투로 봐서는 분명 화가 난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할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할까. 우리는 정말 아닌걸까? 다시 시작할 수 없을까? 너와 나의 시간이 어느덧 3년인데 그 시간이 아무렇지 않게 사라지기는 할까. 그렇다고 이미 떨어지자 말해버린 조각이 다시 붙혀질까. 깨진 그릇처럼 이미 갈라지기 시작했는데... 우린 여전히 사랑일까 이별일까.

파스타집으로 가기 위해선 지하철보다 버스가 편하다는 생각에 버스 정류장으로 발길을 돌려야지 마음을 먹고 뒤를 도는 순간 철퍽, 온 몸에 시원한 액체가 떨어졌다.

"어머, 죄송합니다. 어머 어떡해...!!"

"아...아닙니다. 제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서 그런건데요."

흰 와이셔츠에 번지는 검은 커피의 자국과 온 몸에 축축하게 떨어지는 커피 방울들, 손으로 옷에 남아있는 물기를 털어냈다. 아.. 어떡하나...

"괜찮으세요? 정말 죄송합니다. 어떡해에.."

울먹거리듯 어쩔줄 몰라하는 여자를 보면서, 짜증도나고 한숨도 났지만 내 잘못이 크기 때문에 뭐라할 수도 없었다.

"아닙니다. 세탁하면 됩니다. 괜찮으세요? 제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서 놀라셨죠?"

애써 침착하게 마음을 누르면서 집에가서 옷을 갈아입어야할지, 약속 장소로 바로 가야할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앞에 여자는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내 몸에 묻은 커피들을 닦아 냈고, 퇴근하는 모든 사람들은 스쳐지나가면서 무슨일 난듯이 쳐다보았다. '우습다. 인생 참 우습다.' 정말이지 비라도 내리면 좋겠는데 말이야.

"괜찮습니다. 별일 아니라면 제가 급한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커피값은 물어드리겠습니다."

"아..아니에요! 제가 잘못했죠. 정말 죄송합니다. 제 명함이에요. 세탁비 드릴테니까, 꼭 연락주세요!"

억지로 쥐어지듯한 명함을 주머니에 꾸겨넣고 핸드폰으로 전화를 누른다. 아직까지 바뀌지 않은 이름도 어색하고, 이런 상황도 짜증이 난다. 가는 길을 쳐다보고 있는 시선을 느끼면서 통화음을 듣는다. 그녀는 받지 않고, 후.... 기다린다고 했으니까. 집에 들렸다가 가기는 시간이 애매하고, 주변의 스파 브랜드로 눈길을 돌린다. 옷을 사고 가야겠다. 급하게 매장에 들어가서 셔츠와 바지를 찾는다. 어차피 바지는 수선이 필요하지만 지금은 급한대로 옷을 고르고 계산대에 섰다. 직원이 바코드를 찍고 계산을 하려는 찰나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만요, 이걸로 계산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