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쉽니? 되겠니?
다른 사람들은 치킨을 주문할 때 뿌링클을 먹을지, 갈비어쩌구를 먹을지, 어디서 먹을지를 고민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참 올드하게도 여전히 양념반, 후라이드반을 고민도 없이 시킨다. 가끔 순살을 할지 안할지에 대한 고민이 추가될 뿐이다. 반반 참 좋다. 정확하게 부위를 반으로 나눠서 분배해 준다. 나는 양념이 묻은 닭다리도 소금을 묻힌 닭다리도 먹을 수가 있다. 하나를 반으로 나누어서 공평하게 전달이 되는 것. 얼마나 평등하고 공평한 일인가!
하지만 살다보면 그 무엇도 정확하게 반으로 나누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게된다. 학교에서는 과제를 할 때, 누가 더 노력을 했는가를 나누기 힘들고, 회사에서는 누가 더 많은 기여도를 회사 이익에 참여했는지 측정하기 힘들다. 막말로 3이서 밥을 먹고 만원이 나왔다면 N빵을 할 때 누군가는 3334원을 내야한다. 삶은 생각만큼 정확하게 배분되어서 떨어지는 법이 없다. 특히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더욱 그런 점들이 많은데 그 중 가장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랑도 반반이면 얼마나 좋을까. 딱 정확하게 같은 양만큼 서로를 좋아하고 서로를 그리워하는 거다. 오빠는 날 안좋아하는 것 같아,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하면서 싸우지 않아도 되고, 헤어지고 나서도 내가 더 사랑하지 못해서 후회가 된다면서 울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 누구도 더 좋아하지도 않고 덜 좋아하지도 않고 내가 좋아하는 만큼 상대도 날 좋아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반반씩 서로를 사랑하면 우선 싸우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내가 한 만큼 상대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 불평을 할 수도 없다. 내가 더 많은 사랑을 원한다면 더 많이 사랑해서 상대에게도 더 많은 사랑을 받으면 된다. 사랑에 있어서 호구라는 단어도 사라질지도 모른다. 어장관리도 없고, 우리는 정말 이상적이고 합리적인 사랑만 남은 사회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어떤가? 생각만으로도 아름답지 않은가?
하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세상은 합리적이지않고 굉장히 많이 이성적이지도 않다. 불평등이 만개하면서 가치의 기준자체도 모두가 다르다. 내가 이야기하는 정확히 한만큼, 받은만큼 주는 반반의 사랑은 어쩌면 죽어도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사랑이 우리가 알기 쉽게 이상적이고 합리적이라면 모두가 하고 싶어하는 것이 되었을까?
미스터 션사인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여주인공이 왜 영어를 배우냐고 물었을 때 아랫것이 "Love"를 하고 싶어서라고 한다. 여주인공은 남주인공에게 "Love"가 무엇인지 물었고 남주인공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고 어려운 것"이라고 답한다. 사랑은 어렵다. 그래서 모두가 하고 싶고 낭만적인 것이다. 사랑이 반반이면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들이 찬사받지 못할 것이고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슬픈 이별 이야기들은 멍청한 자들의 놀음으로 판단될 것 이다. 집착과 잘못된 사랑에 망쳐지는 사람들이 벌이는 사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봐라. 사랑은 어려워서 모두가 원하는 것이다. 갖지 못해서, 정확하게 내가 원하는대로 움직여지지 않아서. 그래서 모두가 사랑을 갈구하고 원한다. 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주문한대로 오는 치킨처럼 사랑은 오지 않는다. 이래서 늘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고 날 좋아해주는 사람은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은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뭐 어떤가, 내가 안좋아하는 사람이 갑자기 좋아질 수도 있고 날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어느날 문득 나도 널 좋아한다고 말 할 수 있지도 않을까? 모든 것은 시선과 시야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고 이러한 반전이 있기 때문에 사랑에 대한 이야기들이 대대손손 내려오는 것 아닐까? 치킨은 반반이 되지만, 사랑은 반반이 되지 않는다. 정확하게 나뉘어지지 않는 관계에서 우리는 배려를 배우고 상대를 이해하는 법을 배운다. 누가 더 좋고 누가 더 나쁘고 날 좋아하네 사랑하지 않네로싸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각자의 사랑이 다른 거니까.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만 사랑하고 아파하자. 그 이상은 본인이 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