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05. 그냥 보고싶어서
그녀와의 첫만남은 차분하고 조용했다. 어쩌면 나는 처음 그런 그녀의 모습이 좋았었을지도 모른다. 첫 만나기로 한 날에 그녀는 나보다 먼저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퇴근하기 직전에 사고가 터졌고, 사고를 처리하고 가다보니까 약속한 시간보다 30분 정도 늦게 되었다.
[죄송합니다. 회사에 일이 생겨서 조금 늦을 것 같습니다...]
[아니에요. 천천히 오셔요~]
급하게 일을 마무리하고 파스타집으로 갔을 때 그녀는 가만히 테이블에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다. 검정색 원피스에 짧은 단발이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이 들었고, 주변의 소음에도 그녀의 자리 근처는 고요가 머무는 것 처럼 조용했다. 인기척이 느껴졌는지 그녀는 감은 눈을 뜨고는 짧게 웃었다.
"아,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K라고 합니다."
S와의 첫만남을 떠올리는 사이 약속장소에 도착하였다. 처음 파스타집에서 만난 후 관계가 시작되었고, 우리는 다투고 화해를 할 때마다 여기로 왔었다. 화해의 장소이며, 새로운 시작의 장소인 이 곳에 처음 헤어진 우리가 다시 만난다. 그녀는 우리가 싸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시작이 이 곳인 만큼 끝도 여기라고 생각한 것일까?
자리를 안내받아서 2층으로 올라갔다. 창가 옆 가장 구석진자리에서 그녀는 차분한 오피스룩을 입은 상태로 눈을 감고 있었다. S는 종종 눈을 감으면서 명상을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명상이 끝난 후의 그녀는 거침이 없었다. 평일 저녁시간이어서 그런지 가게에는 사람이 많이 없었다. 2~3개의 테이블에서 사람들이 담소를 나누면서 음식을 먹었고, 나는 조용히 그녀의 앞에 앉아서 그녀가 눈을 뜨기를 기다렸다.
"안올줄 알았는데, 왔네?"
문자와는 다르게 차분한 그녀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조금은 화가 난 줄 알았는데 너무나도 괜찮은듯한 차분한 모습이 조금은 낯설었다. 내가 아는 S가 맞는걸까.
"그거 알고 있었어? 나는 이 파스타집이 참 좋았어. 자기를 처음 만난 곳이기도 하고, 음식도 맛이 있으면서 분위기도 참 조용하거든. 이런 장소를 고른 당신이 참 좋았어. 어색하고 서투르지만 그리고 조금 느리지만 꼭 맘에 드는 곳을 찾아내니까."
S는 창밖을 보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담담한척 말했지만, 그녀가 날 쳐다보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눈물이 날 것 같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늘 차분하고 담담하면서도 눈물이 많았던 S인데 오늘은 꾹 참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
딱히 대답할 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이 가게는 좋은 장소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물어물어 발견한 곳 이었다. 사실 S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S를 만나기전 소개팅 역시 이 장소에서 했었다. 그때 꽤 괜찮은 장소였기에 다시 또 이 집을 왔었다. 그 후, 이 집은 우리의 아지트처럼 변했지만 말이다.
"오늘 일이 하나도 손에 잡히지가 않더라. 아무것도 못했어. 언젠가부터 변하는 것 같다고 느꼈고, 아, 물론 우리 둘다야. 그리고 이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몰랐어. 우습지. 매일 책을 읽어도 내 앞가림하나 똑바로 하지도 못하고..."
물컵을 잡는 S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감정을 참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자꾸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 역시 똑같았는데, 우린 왜 이렇게 늦은걸까.
"배고프다. 우선 뭐라도 시킬까? 아무리 우리가 여기 단골이어도 음식도 안 시키면 눈치보이지 않겠어?"
S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굳게 다문 입술이 너무 붉어서 피가 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이 어색한 분위기가 나처럼 너도 싫겠지.
"그럼 주문은 내가 알아서할게? 알았지?"
작게 끄덕이는 S를 무시하고 종업원에게 이것저것 음식을 시켰다. 크림파스타와 명란파스타 그리고 화이트 와인을 두잔 주문했다. 식전빵과 와인이 나오기 전까지 우리는 아무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왜 보자고 했어?"
와인잔을 들면서 S에게 물었다. S는 흘기듯이 나를 쳐다보고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뜸을 들였다.
"그냥, 보고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