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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요로움 Jul 21. 2020

눈물의 의미

할머니를 보내드렸다.

할아버지를 20여 년 전에 하늘나라로 보내드리고 코로나 19로 어수선한 여름 할머니도 보내드린다.

민정례 1927. 2. 00.  올해로 94세, 딸들 손에서 병시중받으시다가 2020년 7월 3일 오후 3시경 호흡곤란을 겪으시다가 하늘나라로 가셨다.

이름 석자와 생년월일, 사망 날짜만 새겨진 납골 항아리에 담겨 납골당에 모셔졌다.


울음바다가 된 딸들과 다르게 아들들은 초연하고 담담하게 장례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딸들은 감정이 울음으로 표출되었기에 어떤 상태인지 짐작이 되지만 아들들은 울음을 삼키고 한 여인의 입관식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내게는 할머니이신 민여사는 스무 살에 첫아들을 낳았다. 내겐 아버지인 첫아들 그 아래로 여섯의 자녀를 더 낳으셨다. 할머니 슬하에 20살 때부터 엄마가 되어 7남매를 두셨다.


할머니는 일제 강점기(1910년 8월 29일~1945년 8월 15일) 시대에 사셨고 해방 이후 47년에 첫아들인 우리 아버지를 낳으셨다. 우리 아버지는 영화배우를 닮았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미남에 총명한 첫아들이라서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셨다고 하신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는 할머니 차지가 될 수 없었다. 

할머니는 7남매를 낳으시면서 6.25도 겪으시고 시집살이도 하셨다.

4남매 큰며느리로 시집오셔서 일본 유학까지 하신 우리 할아버지와 사시면서 마음고생이 좀 있으신듯하다. 가끔 뵙는데도 할아버지의 좋은 부분보다 안 좋은 부분을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할아버지의 성품은 잘 굽히지 않는 성품이어서 일제강점기 때 교사일 때도 바른말을 하셔서 학교 선생님일을 그만두셔야 했다. 공부만 하고 스승의 역할만 하셨던 분이라 농사일은 젬병이셨다고 하신다. 그러니 농사일은 대부분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그리고 할머니의 몫이었다. 소위 말하는 대쪽 같은 성품을 가진 할아버지와 층층시하에 살아야 하셨던 할머니가 어떻게 살았을지 짐작이 된다.

우리 할머니도 한 많은 여인의 삶을 사셨다.


할머니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부모님이 우리 낳기 전에 서울에 상경하셔서 우리는 명절이나 집안 대소사 때 뵙는 것이 다여서 따로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함께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애기 때 잠깐 할머니 댁에서 자랐는데 눈을 뜨면 할머니, 할아버지는 늘 안 계셨다. 저녁이 되어서야 오시는데 그때 저녁을 같이 먹은 기억, 내가 아팠을 때 나를 집에 두고 가실 수 없었던지 황토밭에 나를 눕혀놓고 할머니께서는 호미질을 하던 장면만 떠오른다.


할머니께서 사시던 전라남도 해남은 황토흙이 많아서 고구마가 잘 자란다. 할머니 댁에 가면 고구마 자루가 몇 포대씩 있었는데 고구마들은 내다 팔아 생계를 꾸려나가야 돼서 우리들 입에 들어오는 것은 별로 없었다.

고구마 자루에서 고구마를 꺼내서 먹고 싶었는데 못 먹었던 기억이 난다. 어쩌다가 서울 우리 집에 오셔도 하룻밤 주무시고 고모나 작은아버지 댁을 들르셔야 해서 내가 학교 갔다 돌아올 때쯤이면 이미 가시고 안 계셨다. 그래서 나와는 대화를 나누거나 함께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나는 장손녀지만 장손인 오빠에게 밀려서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온 터라 할아버지, 할머니와의 교류가 그리 많지 않았다.  할머니가 편찮으시다는 말은 올해 초 들었기에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줄은 꿈에도 상상을 못 했다. 계속 그렇게 우리 곁에 계실 줄만 알았다.


연로하셔서 그저 기운이 없으신 줄만 알았는데 급기야 식사를 못하시고 음식을 넘기지 못하신다는 연락이 왔다. 부랴부랴 엄마가 막내 고모네 계신 할머니를 찾아뵙고 병원에 모시고 갔더니 위암 3기란다. 손쓰기에는 연로하셔서 수술보다는 방사선을 해야 한다고...


삼촌 한분은 이미 돌아가셨기에 6남매가 모여서 의논 끝에 내린 결정은 할머니에게 병명을 숨기고 그저 연로해서 그렇다며 할머니 놀라지 않게 안심시켜 드리며, 서로 할 수 있는 의무를 다하며, 아들들은 병원비와 생활비를 보내드리고 딸들은 할머니의 간병을 시작했다. 올 초에 6개월에서 1년은 사실수 있다는 의사의 진단이 있었지만 이렇게 급작스럽게 돌아가실 줄은 아무도 모르셨던 모양이다. 호흡곤란이 와서 엠블런스를 불렀는데 그만 그렇게 아무 유언도 못 남기시고 돌아가셨다.


나의 부모님과 고모들 그리고 작은아버지들의 황망해하시는 모습을 봤다. 이렇게 빨리 가실 줄 몰랐다며 하염없이 우셨다. 잘못한 것들만 생각나시는 모양이다. 입관식 내내 자신의 잘못과 보이는 상황들을 말씀하시면서 통곡하시는 큰고모를 보며 위로의 말들이 오히려 가시로 박힐까 봐 등을 도닥이며 뭉친 근육들을 풀어드리며 쓰러지지 않게 부축하며 함께 우는 것 밖에...


늘 쪽진 머리에 한복 입으신 단아한 할머니 모습은 뵈었어도 예쁘게 꽃단장하는 모습은 못 뵈었었는데

수의 입으시고 곱게 화장한 얼굴이 어찌나 편안해 보이시고 예쁘시던지...

'우리 할머니 얼굴이 저렇게 편안하고 예뻤었나!'

마지막 가시는 할머니 모습을 뵈니 분명히 천국에 가신 것 같은데...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할머니의 입관식도 보고 납골당에 안치하는 모습도 봤지만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저 유골함에 할머니 이름 석자와 생년월일, 사망 연도와 날짜만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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