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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토 Oct 30. 2022

목메던 찐 밤 반 톨, 미지근한 사이다 한 모금

보늬야! 나도 너하고 친해지고 싶다.

추석을 지내고 며칠 후, 조카아이가 할머니 집에서 내 사진을 발견했다며 톡으로 사진 몇 장을 보내왔다.


어린 시절 여러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중에서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율동을 하고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 속 아이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면서도 웃으며 율동을 하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즐겁게 운동회에 참여했었나 하는 의문과 아버지 눈에는 이렇게 보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장의 사진으로 첫 운동회가 떠올랐다.

초등학교 입학을 하고 처음으로 하는 가을 운동회는 덥고 힘들었다.

뜨거웠던 초가을의 햇볕 아래에서 조그마한 아이들이 선생님의 구령에 맞춰 열심히 율동을 따라 하며 틀리지 않으려 긴장했던 모습이 선연했다.


나는 강렬한 햇살에 눈이 부셔 실눈을 뜨고서도 선생님이 무서워 열심히 율동을 따라 했고, 오전 운동회가 끝나고 점심시간에 많은 인파 속에서 엄마를 찾지 못해 당황했다.

그리고 다른 부모님들보다 늦게 운동회에 온 엄마에게 화를 냈고, 아버지가 나의 모습을 담기 위해 열정적으로 사진기의 셔터를 누르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더위에 지친 나에게 엄마는 김밥을 하나라도 더 먹이려고 했고, 깨물어 반으로 쪼갠 찐 밤을 먹여 주던 아버지에게 목이 메어 먹기 싫다고 고개를 돌리고 미지근한 사이다 한 모금에 행복해했다.


그 후로도 엄마는 가을운동회에는 꼭 찐 밤을 간식으로 싸주었고 나는 먹기 싫어했다. 초가을의 더위 속에서 먹는 찐 밤은 퍽퍽한 식감으로 목 넘김이 힘들어 다른 음식의 도움 없이는 먹기는 힘든 간식이었다.


‘그래, 운동회 때 먹던 찐 밤은 참 맛없었어.’


가을이 되면 아버지가 산에서 밤을 주워왔다며 주고, 시어머니가 집 앞마당에서 땄다며 한 아름 주면 난 마음이 불편했다.

‘아이고, 이 많은 것을 언제 다 먹지?’


밤을 찌고, 단단한 겉껍질을 까고, 속껍질을 깔 때쯤이면 힘이 들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힘들게 깐 밤을 당장 먹을 것만 좀 남겨 놓고 곧바로 냉동실에 넣어 놓고는 곧 잊어버렸다.

겨우내 냉동실에서 굴러다니는 밤을 밥에 넣어 억지로 먹었다.


나에게 밤은 비생산적인 식재료이다.

밤 한 톨을 먹기 위해 들이는 시간과 노동이 싫다.

아니, 진실은 좋아하지 않아서이다.

좋아하지 않는 음식을 위해 들이는 시간과 노동이 나를 짜증 나게 했다.


맛없는 밤에 대한 생각이 바뀐 것은 영화「리틀 포레스트」를 보고 나서였다. 영화 속에서 밤으로 조림을 하는 장면을 보고 ‘밤으로도 저런 요리를 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영화 속 밤은 내가 알던 밤이 아니었다.  


 “설탕을 넣어 끈적끈적한 밤 조림은 밤 과자 같은 식감이다”라고 말하는 주인공의 대사를 들으며 밤 조림 맛이 궁금해졌다.

‘밤 과자 맛이라고?’ 내가 아는 밤 과자 맛은 퍽퍽하고 목메는 찐 밤과 거의 흡사한 맛이어서 의문은 들었지만 영화 속 밤은 맛있어 보였다.


달콤하고 고소하고 포근한 맛이 상상됐다.


밤을 조리하는 장면의 따스함과 차분하고 고요한 분위기에 취한 나는 비생산적이고 좋아하지 않는 밤으로 요리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밤 조림을 해 먹지 않고 있다. 내가 밤 조림을 하지 않는 이유는 영화 속 밤 조림 요리는 근사했지만 조리 과정은 결코 근사하지 않아서이다.


밤 조림 요리법은 생밤을 뜨거운 물에 한 시간 정도 불리고 겉껍질을 까고 베이킹소다에 하룻밤을 불리고 불린 밤을 30분 끓이고 물에 씻고 와인색이 나올 때까지 이 과정을 반복해 준다. 이다음 밤의 굵은 심지를 제거하고 밤에 설탕을 넣고 물을 자박하게 부은 후, 30분을 중불에서 끓이고 간장과 청주 한 큰 술을 넣고 조려낸다. 조린 밤은 소독한 유리병에 넣어 잘 밀봉해 세 달 후에 먹으면 된다.


난 요리법을 보면서 포기하고 말았다.


‘에구, 이렇게 하면서 밤을 먹어야 해? 그래, 먹고 싶으면 사 먹으면 되지, 이 편한 세상에!’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난 이렇게 밤 조림은 그냥 영화 속 멋진 음식으로 남겨 두고 있다.




며칠 후, 아침부터 창 문 밖이 소란스러웠다.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궁금해 베란다로 나가봤다. 길 건너 초등학교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그동안 코로나로 열리지 못한 운동회가 아주 오랜만에 열린 모양이었다.

4차선 도로 건너에서 들려오는 선생님의 구령 소리, 호루라기 소리, 아이들의 함성소리가 정겹게 느껴졌다. 소음이 싫지 않다는 생각을 간만에 했다.


‘그래, 우리의 가을은 이랬지!’


이번 가을엔 아버지가 그랬듯 밤을 푹 쪄 입으로 반을 쪼개고 티스푼으로 살살 긁어먹어야겠다.

그리고 미지근한 사이다가 아닌 시원한 사이다 한 모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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