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희와 돼지비계
꼬불꼬불 꼬부랑길 꼬부랑 할머니
모두가 배려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스러져가는 감미로움과 소박한 삶, 끝없는 겨울잠 속에서 쇠락해가는 슬픔이 있다 -아직 오지 않는 날들을 위하여(파스칼 브뤼크네르)중에서-
“징, 징, 징.”
오늘도 어김없이 빨간 글씨의 재난안전문자가 울린다.
폭염주의보가 발령 중이다. 며칠째 계속된 주의보에 이른 아침부터 더운 느낌이다.
충동적으로 사 온 돼지고기를 구워 먹기 위해 상을 차렸다.
상추와 깻잎을 씻고, 양파와 마늘을 편으로 썰고, 파를 곱게 채쳐서 고춧가루, 참기름, 소금으로 양념해 파절이를 만들고, 봄에 담가 놓은 오이짠지를 참기름과 깨소금으로 무치고, 산마늘 장아찌를 내어 푸짐한 고기 밥상을 차렸다.
상을 차리며 바로 후회했다. 무더위에 고기를 구워 먹을 자신이 없어서다.
“괜히 사 왔나 봐. 너무 더워.”
나의 말에 남편이 말한다.
“괜찮아. 에어컨 틀고 구우면 돼.”
환기를 위해 창을 열고 에어컨을 틀고 선풍기까지 튼 후 남편은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와! 우리 넘 사치스럽다. 에어컨 틀고 고기를 먹다니. 전기세 많이 나올 텐데.”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한 마디를 더했다.
“오늘 하루만 맛있게 먹자.”
남편이 땀을 뻘뻘 흘리며 고기를 구워 돼지비계를 가위로 잘라내고 살코기는 내 앞 접시에, 잘라낸 비계는 아이의 접시에 놓아준다.
각자 좋아하는 부위를 주는 남편의 세심한 배려가 고마웠다.
비계를 좋아하는 남편과 아이를 보니 갑자기 돼지비계만을 드시던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어릴 적 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시면 엄마는 살코기 하나 없는 돼지비계를 구워 드렸다.
외할머니의 밥상은 돼지비계만 오롯이 구운 프라이팬이 놓여 있는 찬이 다였다.
“할머니, 맛있어?”
난 비계를 먹는 할머니가 이상해 보였다.
“응, 맛있어.”
할머니는 비계를 오물오물 어린아이처럼 먹으며 말했다.
그나마도 워낙 천천히 드셔서 시간이 지나 허옇게 굳어있는 돼지기름이 맛없어 보였다.
나는 또 물어봤다.
“할머니, 맛있어?”
밥을 다 드신 할머니는 이층에 있는 내 방으로 가셨다.
등이 굽은 할머니는 이층 계단을 두 손으로 짚고 힘겹게 올라가셨다. 철없던 나는 할머니처럼 두 손을 짚으며 쫄랑쫄랑 따라 올라갔다.
이층엔 옥상으로 가는 계단이 있었는데 할머니는 그 계단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면 몸집이 작은 할머니가 더 작아 보였다.
할머니는 앉은 채로 한복 속 고쟁이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답배를 꺼내 피우셨다.
담배를 피우는 할머니 등 뒤에서 나도 똑같이 쭈그리고 앉아 물어보았다.
“할머니, 맛있어?”
“아녀, 맛없어.”
“그런데 왜 피워?”
“그냥.”
“근데, 할머니는 언제부터 담배 피웠어?”
“음, 니 할아비가 갈쳐줬어. 그때부터 폈써?”
“할아버지는 왜 갈쳐줬어?”
“임자, 심심할 때 한 대 하소, 하고 할아비가 그랬어.”
“그래서 인자 안 심심해?”
“응, 인자 안 심심해.”
“근데, 할머니 담배 피우면 엄마한테 혼나는데.”
“응, 인자 안 필께.”
담배를 피우며 하늘을 바라보던 등 굽은 할머니와 그런 할머니를 바라보던 어린 날의 내가 생각났다.
할머니가 피우던 담배 이름은 환희였다. 담배 이름이 환희라니!
기쁨과 즐거움을 선사하는 담배인 건가?
맛있는 돼지비계를 먹고 맛없는 담배를 피우던 할머니는 몸의 즐거움과 마음의 기쁨을 느끼셨을까?
그러면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환희를 선물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