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재영 Apr 29. 2023

13. 장소와 사랑에 빠진 적 있는가?

나만의 고민상담소

아주 빼어난 명소라고 모두의 사랑을 받는 건 아닌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니 사랑이라는 것은 어느 사이에 있든 비슷한 성향을 나타내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중랑구라는 곳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인생의 절반 이상을 보냈다.


어릴 때부터 물가를 좋아했는데 집에 나만의 공간이 없어서 답답할 때면 중랑천에 나와서 마음을 환기시켰다. 어떤 날은 새벽에 나와 울기도 했는데 옆에 어떤 여성분도 울고 계셔서 뭔가 눈물이 뚝 그쳤졌다.ㅋㅋ


새벽에 그렇게 혼자 나가면 위험하지 않냐고 하는데 맞다. 위험하다. 한 번은 목발을 갖고 있는 아저씨가 평상에 앉아있었는데 내가 그 옆을 지나 중랑천으로 향했다. 중랑천 산책을 가는 나를 갑자기 목발도 냅두고 쩔뚝거리며 쫓아왔는데 나도 놀라서 전속력으로(우사인볼트처럼 볼을 떨면서ㅋㅋ) 뛰다가 계단으로 두 칸씩 올라가니 그제야 그 아저씨가 계단에 주저앉았다.


친구들은 지갑 떨어져서 주워주려고 그런 거 아냐? 하는데ㅋㅋ 떨어질 지갑도 없었고ㅋㅋ 계단 위에서 쳐다보니 아무 말 없이 노려보기만 했다. 그 일로 무서워서 새벽 산책은 피하게 됐었다.


아무튼 중랑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억이 많다. 중랑천은 내 첫사랑이다.

중랑천 달 밝던 밤.

거주지와 먼 곳과 사랑에 빠진 적도 있다.


내 인생의 최악의 시기라고 할 수 있는 2013년을 지나고 마음이 썩어가던 때 직장도 때려치우고 쉬다가 혼자 처음으로 여행을 가봤다. 그때 부산 광안리도 처음 보았는데 너무 아름다웠다. 근데 그날이 그랬던 것 같다. 그 후로 광안리를 자주 갔었는데 그날만큼의 느낌은 들지 않았다.

2014년. 광안리를 처음 보다.

아무튼 처음 간 날 숙소도 잡지 않고 하염없이 바다를 봤었던 것 같다. 이날 이곳과 사랑에 빠졌다. 이날 일기에 기억의 서랍이 있다면 이 날의 모든 것을 담아 종종 꺼내보고 싶다고 썼는데 아쉽게도 그런 서랍은 없어서 이 날의 기분도, 나의 감정도, 광안리의 모습과 분위기도 흐릿해져 간다.



그 후에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광안리는 날 반겨줬지만 14년도만큼의 감정은 아니었다. 그것도 참 신기한 일이다.


그리고 캐나다에 1년 살았던 때에도 사랑에 빠졌었다. 캐나다에 도착한 날 사랑에 빠진 곳이 있다.(이쯤 되면 금사빠 아닌가ㅋㅋ)

토론토의 한 호수인데 택시를 타고 숙소 가는 안에서 처음 봤었다. 저게 바다냐고 물었더니 호수라고. 어쩌고저쩌고 설명해 주셨는데 하나도 못 듣고ㅋㅋ 호수의 아름다움에 빠졌던 기억이 있다.


그 후로 집을 호수와 먼 곳에 구했음에도 쉬는 날 지하철을 타고 이 호수에 와 나만의 이야기를 건넸다.

호수도 매번 다른 모습이어서 질리지 않았다. 지금도 그립다. 사람 심리가 참 그런 게 자주 못 본다는 걸 아니까 더 사랑했던 것 같다. (곁에 있는 것도 늘 볼 수 있는 게 아냐!! 소중히 하라고!! ㅋㅋ)


한국에 돌아와서 처음으로 서울이 아닌 곳에 살게 되었다. 바로 인천. 여기서도 나의 타입은 물가ㅋㅋㅋ

아라뱃길의 한 조형물.

아라뱃길이라고 좋은 산책길이 있었다. 근데 이게 체력의 문제인지 시간의 여유의 문제인지 점점 장소에 대한 사랑도 적어져 가는 것 같기도 하다.


현재 다시 서울로 이사 오고 나서는 그만큼 좋아하는 장소는 아직 없는 것 같긴 하다.


돌아보면 내가 사랑했던 장소는 나의 고민상담소였다. 그 장소와 나만의 비밀이 있는 것이다. 항상 그 자리에 있고(물론 변할 수도 있겠지만) 어디에 나의 비밀을 발설하지도 않고 모든 이야기를 다 들어주는 이 믿음직한 친구 하고는 사랑에 빠지는 것이 당연한 일 같기도 하다.


그래서 궁금하기도 하다. 나의 사랑했던 장소들은 나의 비밀 말고도 얼마나 많은 비밀들을 품고 있을지.

매거진의 이전글 12. 내 심장을 뛰게 하는 건 무엇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