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행 Sep 12. 2020

한국 단편문학 깊이 읽기 2

정미경, 「내 아들의 연인」

권태가 지나면 환멸이 온다고 

   

「내 아들의 연인」의 화자 ‘나’는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유지하는 ‘부잣집 사모님’이다. 그녀의 일상은 매일 아침 자수성가한 남편과 무탈하게 장성한 아들이 집을 나가고 난 후 백화점과 마사지 숍을 번갈아 들르며 편안하고 여유 있는 삶이 주는 평화로움과 권태로움, 그로인해 생겨난 피로감을 달래는 시간들로 채워진다. 한가로운 그녀에게 어느 날 아들의 여자 친구 도란이라는 존재가 끼어들면서 ‘나’의 삶에는 미세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컨테이너에 살 정도로 가난한 도란에게서 ‘나’는 자신의 속물적인 모습을 발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균열은 ‘나’의 조용하고 편안한 삶을 깨는 어떤 불편함을 동반한다. ‘나’가 구축해온 세계는 ‘안정적 삶’이 보장되는 세계였다. ‘나’의 싱그러웠던 젊은 시절 그녀가 “명백히 가난하고, 재수해봤자 괜찮은 대학 가긴 어려울 것 같은 비전이 보이지 않는 남자”를 버리고 지금의 남편을 선택한 이유는 전자를 택했을 때 닥쳐 올 수 있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아직 도착하지는 않았지만 곧 도착할 것 같았기에 ‘나’는 불안한 남자의 미래에서 하차해버렸다. 그리고 보다 안전하게 자신을 목적지까지 데려다 줄 남자의 차에 올라탔다. 그것은 “결혼이라는 벤처”에 대한 과감한 투자였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 성공은 곧바로 삶의 여유와 안정감을 제공했고 그런 삶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 ‘과감한 선택’은 반복되는 안정감에 딸려오는 권태감까지 막아내지는 못했다. 그 대가는 컸다. 무엇보다 ‘나’는 “피곤하지는 않으나 생기는 없는, 아무 갈망이 없는 연기처럼 흐릿해져버린” 자신의 모습과 대면하는 일이 점점 더 두려웠다.   

    

그런 ‘나’에게 도란이는 “권태로운 여행지에서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있다 우연히 찍게 된 유에프오 같은 존재”였다. 도란이는 제게 주어진 삶을 당당히 뚫고 나가는 대담하고, 그래서 존재가 빛나는 아이였다. ‘나’는 손수 뜬 목도리를 선물로 내미는 도란이의 행동에 마음이 아련해졌고, 도란이를 보면 “뱃속까지 뭔가가 뭉글뭉글 피어나면서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도란이는 저 너머의 세계에 있는 아이 같았다. 도란이가 구축해 가고 있는 세계는 남자 친구의 성공 가능성으로 결혼을 타진해 보는 세계가 아니었다. 도란이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섣부르게 절망하지 않고, “삶을 자유롭게 유영”하면서도 자신만의 존재를 지킬 줄 아는 아이였다. 말하자면, 아직 오지 않은 ‘불안’ 따위 때문에 현재의 ‘안온함’이라는 선택을 허용하지 않았다. 도란의 세계는 두려움은 있을지라도, 적어도 권태감과 그것이 주는 환멸감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의 눈에는 이렇게 자신과 다른 세계를 구축해가는 도란이가 어찌 매력적인 존재로 보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도란이를 좋아한다고 해서 ‘나’가 섣부르게 도란의 세계로 건너올 수는 없는 일이다. 이미 그 세계를 보았고, 자신의 “메모리에 그 모습이 남아 있지만, 현실의 네트워크 속에서 그저 그대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누구의 공감도 끌어낼 수 없음을 알고 있기에 침묵해야”만 했다. 삶이 주는 안정감은 이렇게 생각보다 견고하다. 그것은 누군가가 아파트 주차장에서 낸 접촉사고로 엉뚱한 사람이 피해를 받는 과정에 대한 진실을 모두 알고도 침묵하는 ‘나’의 행동과 닮아있다. 지금의 삶을 유지하려면 ‘침묵’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나’는 안정감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으므로 자연스럽게 권태에도 길들여져 버렸다. 도란이의 세계를 엿보고 그로인해 자신의 삶에 약간의 균열이 생기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자신의 삶을 바꾸어버릴 만큼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나’의 세계는 전과 같이, 현재도, 미래에도 비슷하게 굴러갈 것이다. 불안은 부재할 것이고 그래서 권태는 삶의 일부분으로 더 단단해 질  것이다. 누가 그랬던가, “권태가 지나면 환멸이 온다고” 이렇게 ‘나’가 보여주는 견고한 인식의 작동방식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섬뜩하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이외의 세계’ 즉, ‘나’가 갇혀 있는 ‘바깥의 세계’에 대한 상상력이 아닐까. ‘나’에게 아직 도란의 세계를 상상해 볼 수 있는 힘이 남아있으면 좋겠다. ‘이외의 세계’ 너머를 그려볼 수 없다면 우리는 끝내 “상상력의 황폐함”에 갇혀 자신에게 끊임없는 저주를 퍼부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권태가 지나면 환멸이 온다. 그래도 괜찮은가.            

작가의 이전글 왜 소설을 읽는가 7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