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진, 「사물과의 작별」
우리가 작별을 고할 때
여기 한 남자를 평생 잊지 못해 애달파하는 한 여자가 있다. 조해진의 「사물과의 작별」에서 고모로 등장하는 그녀가 잊지 못하는 남자는 30여 년 전 아버지가 청계천에서 운영하는 레코드판 가게에 손님으로 온 서 군이다. 서 군은 재일조선인으로 평소 막연히 동경해오던 고국에서 법학 석사학위를 따기 위해 입국한 유학생이었다. 하지만 1971년 그 당시 한국의 대학은 “시위와 휴교가 반복”되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서 군은 아무 일 없었던 듯이 혼자만 “교정에서 책을 읽는 것 자체가 거대한 부채감으로” 느껴졌기에 시간이 나면 청계천의 레코드 가게에 들러 음악으로 마음을 달래곤 했다.
그 무렵 서 군은 갈 곳 없는 고향 친구를 그의 하숙집에 기거하게 해주었는데, 나중에야 그 친구가 조총련과 접선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체포령이 떨어졌고, 서군은 경찰이 언제 들이 닥칠지 모른 다는 불안감 속에서 하숙집에서 문제가 될 만한 서적들은 모두 태워버리고 자신이 쓴 원고 하나는 고모를 찾아와 맡기고 사라진다. 이후 연락이 끊긴 서 군에게 원고를 전달하기 위해 고모는 K대학을 찾아가고 그곳에서 조교라고 생각한 한 청년에게 아무런 의심 없이 서 군의 원고를 넘긴다. 보름 정도 후에 언론을 통해 서 군이 일본 간첩단 조직의 일원으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고모는 자신이 전달한 그 서류가 서 군을 체포하는데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서 군에게 “용서할 수 없는 죄 덩어리”가 되었음을 자책한다.
그 당시 “고모의 추측대로 그 원고가 불온한 내용이고 기관원에게 흘러들어가 또 다른 증거물이 되었을 수도 있지만, 그 모든 건 진실이 아니었다.” 나중에 출간된 서 군의 에세이를 보면 고모가 그 원고를 젊은 청년에게 넘기기 이전에 벌써 서 군은 이미 체포되었다고 나오기 때문이다. “어쩌면 고모는 자신의 잘못을 믿고 싶어서 믿어버린 건지도 몰랐다. 악역으로라도 그의 삶에 개입하고 싶었을 고모의 마음”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고모는 그렇게 명확하지 않은 사실을 진실로 만들어 버리고 그 견고한 영토 안에서 평생을 살아왔다. 고모의 외로운 삶에 대한 명확한 이유는 고모가 서 군을 사랑했다는 점이 전부이다. 이런 고모의 사랑은 서 군이 부재한 상태에서 서 군의 이미지만을 사랑한 실체가 없는 사랑이었다.
그 상상력의 힘으로 고모는 30년이 흐르는 세월동안 결혼도 하지 않고 서 군만을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 당시 고모는 서 군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원고를 맡겼다는 것이 “순수하게 기뻤다” 단 한 번의 데이트와 국수를 먹은 기억이 ‘사랑’의 전부였지만, 서 군은 늘 고모의 가슴에 살아있는 사랑과 회한, 미안함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 ‘사랑’은 고모 혼자만의 사랑이었다. 서 군은 감옥에서 나온 뒤,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를 마치고 대학교수가 되었고, 결혼하여 딸을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이제 고모는 초로의 나이로 접어들어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하던 일을 정리한 상태이지만 서 군에 대한 사랑과 미안함은 여전히 실체가 아닌 이미지로 가슴 속에서 살아남아 있다. 이런 고모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나’는 딱 한 번만 그들을 만나게 해주기로 하고 고모를 서 군이 있는 병원으로 데려간다. 서 군 또한 근육이 굳어가는 병을 앓고 있으며,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생명을 연장하는 환자이다. 서 군을 만난 고모는 정작 서 군을 앞에 두고 엉뚱한 사람에게 성큼성큼 걸어가서 쇼핑백을 건네면서 “미안하고 또 미안했습니다. 전부 다 잊어주세요.”라고 말한다. 쇼핑백안에는 양말과 비누, 수건과 담요가 들어있었다. “서 군의 한 시절을 망쳤다는 그 근거 없는 죄책감은 끈질기게 고모를 상상의 법정으로 끌고”갔고 그런 고모의 인생은 이제 망각의 저편으로 넘어가 버렸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제된 채 살아온 고모의 삶이 주인 없이 방치된 ‘유실물’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에 이른다. 유실물 센터에서 일하는 ‘나’는 그동안 수많은 ‘유실물’들을 봐왔다.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유실물들은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약 없이 기다린다. 그러다 결국 1년 6개월이라는 보관기간을 채우면 소각되어버리고 마는 유실물들처럼 고모도 이제 “한 개인에게 귀속되지 못하고 망각 속으로 침몰해야”하는 지점에 다다랐다. “그 기능에 문제가 생기면 쓰레기통에 버려진 뒤 매립되거나 소각되는 하나의 사물”처럼 우리 인간의 삶도 결국은 매립되고 소각되어 버리는 게 아닐까. 우리가 삶에서 무심코 내다 버린, 혹은 잃어버리고도 찾지 않고 있는 “사물”들은 없을까. 그 “사물”들에게 다시 한 번 고한다. “미안하고, 또 미안했습니다.”라고. 그것이 하나의 “사물”이기도 한 인간이 또 다른 “사물”에게 작별을 고하는 태도일 테니. 조해진은 「사물과의 작별」을 통해 인간 존재가 “사물”과 다르지 않음을 고모와 서 군의 삶을 통해 보여주고, 그 “사물과도 같은 존재”가 말하는 삶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그만의 고유의 무늬가 있다는 것을 섬세하게 드러낸다. 사물과 사물이 서로를 알아본다면, 그 시선은 분명 그윽한 빛으로 가득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