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단편문학 깊이 읽기 6
사소하고도 중대한 삶과 욕망 그리고 죽음
김훈의 「화장」은 ‘나’의 아내가 세상을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당직 수련의가 “운명하셨습니다.”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내의 시신은 냉동실로 옮겨진다. 화장품 회사의 중역인 ‘나’는 지난 5년 동안 뇌종양으로 죽어가는 아내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해왔다. 간병인이 오지 않는 날은 아내를 목욕시키고 가랑이 사이로 흘러내린 똥물을 닦아냈다. 그럼에도 ‘나’는 아내의 고통을 잘 알지 못했다. “아내가 두통 발작으로 시트를 차내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때도, 그 고통은 ‘나’에게 건너올 수 없었기에 ‘나’는 그것을 감각할 수 없었다. ‘나’는 다만 아내의 고통을 바라보는 자신의 고통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에 따라 ‘나’가 감각하는 죽음도 무덤덤했다. ‘나’에게 아내의 죽음은 “휴대폰이 배터리가 닳아 죽는 것처럼, 죽음에 임박한 아내가 숨을 거둘 때 심전도 계기판에서 나는 하찮은 소리처럼 사소”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요도염을 앓고 있는 ‘나’는 자신의 배뇨 고통은 날카롭게 느낀다. 병원에서 방관에 차오른 오줌을 빼낼 때, “요도 속에서 오줌방울들은 고체처럼 딱딱하게 느껴졌고, 오줌이 빠져나올 때 요도는 불로 지지듯이 뜨겁고 쓰라렸다. 몸속에 오줌만 남고 사지가 모두 떨어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죽은 아내의 시신이 실려 나갈 때도 ‘나’는 방광의 무게에 짓눌려 침대 뒤를 따라가지 못했다. 이렇게 ‘나’에게 타인의 고통은 감각할 수 없으므로 ‘모호하고 사호한 것’이 되만 자신의 고통은 알 수 있는 것이므로 ‘명확하고 중대한 것’이 된다. 타인의 고통은 그 자신에게는 중대하지만 ‘나’에게는 사소한 것처럼 ‘나’의 고통도 타인에게는 사소한 것이 될 것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고통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는 점이다. 소설은 이렇게 서늘하게 인간이 느끼는 ‘고통’을 객관화하여 보여준다. 이는 ‘있는 그대로를 정직하게 표현’하는 김훈 특유의 서술 방식이다.
어찌 되었든, 세계는 고통과 상관없이 흘러가기 마련이다. ‘나’는 아내의 장례를 치르는 와중에도 결재서류에 사인을 하고 밀린 회사업무를 본다. ‘나’는 연모하는 회사 부하직원 추은주의 생동감이 넘치는 몸을 상상 속에서 떠올린다. 그녀의 몸을 눈으로 더듬으면서 욕망한다. “그녀의 둥근 어깨와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과 그 머리카락이 그녀의 두 뺨에 드리운 그늘은 의심할 수 없이 뚜렷하고 완연한 몸”이었다. ‘나’에게 아내는 현실이고 닿을 수 없는 추은주는 관념이다. 이렇게 아내와 추은주, 죽음과 삶, 시들어가는 육체와 생동하는 육체는 현실과 관념으로 ‘나’안에서 공존한다.
‘나’는 추은주에 대한 욕망의 실체에 다가갈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인식하고 있다. 그것은 죽어가는 아내를 돌보고 있다는 남편으로서의 윤리적 차원이 아닌, 점점 쇠잔해가는 ‘나’의 육체에 있다. 요도염을 앓고 있는 ‘나’는 정기적으로 비뇨기과에 가서 요도에 줄을 꽂아 소변을 빼내야 한다. ‘나’의 몸은 이미 남성성을 잃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추은주에 대한 욕망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나’는 상상으로 추은주를 욕망한다. 그녀의 몸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떨쳐낸다.”
에로스는 생의 본능을, 타나토스는 죽음의 본능을 의미한다. 프로이드는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대비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라캉주의자들은 죽음의 본능을 무의식을 형성하는 일차적 억압에 필요한 특수한 에너지라 하였고, 욕망의 모태라고 보았다. 따라서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언뜻 보면 서로 대립되는 의미로 쓰이지만 그 밑바탕은 하나로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나’의 추은주에 대한 욕망이 에로스라면,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한 결핍은 ‘타나토스’로 나타난다.
실현되지 못한 ‘나’의 욕망은 두 가지의 타나토스의 양상으로 발현되는 데, 먼저 추은주의 육체를 철저하게 외면하는 것이다. ‘나’는 고의적으로 그녀를 육체적으로 무감각한 대상으로 설정하고 자신의 욕망을 억압하는 자학적인 모습을 띤다. 다음으로 욕망이 충족되지 않은 결핍의 양상은 생명이 있는 것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충동으로 나타난다. ‘나’는 아내가 목숨처럼 아끼던 개‘보리’를 아내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안락사 시킨다. 억압된 욕망은 어떤 방식으로는 뚫고 나오기 마련이다. ‘나’에게 결핍된 욕망은 추은주의 육체를 외면하고 거부하려는 태도로, 아내가 아끼던 생명을 거두는 일로 채워진다. 결핍은 욕망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고, 욕망 또한 결핍이 있기에 인간에게 중대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나’는 아내의 장례를 치를 때까지 결정을 미루고 있던 회사의 광고카피를 ‘가벼워진다’로 결정한다. ‘내면 여행’은 너무 관념적이었으므로, 삶은 그렇게 “지지고 볶을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과연 ‘나’의 결정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까? 인간이 결국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라면, ‘나’의 선택은 사소한 것일까? 중대한 것일까? 알 수 없다. 인간은 그저 살아가는 것만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