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희, 「보통의 시절」
한국 단편문학 깊이 읽기 7
불행한 일은 어떻게 보통의 일이 되는가
미국 과학자들이 쥐를 우리에 가두어 놓고 신체 일부에 충격을 가하는 실험을 했다. 예상치 못한 신체적 충격을 받은 쥐들은 괴성을 지르거나 높이 뛰어 오르면서 자신들이 받은 충격의 강도가 얼마나 센지를 온 몸으로 표현했다. 그들은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강도의 충격을 쥐들의 신체에 가하면서 그 반응을 살폈다. 그 결과는 흥미로웠다. 쥐들은 횟수가 더 해질수록 처음과 같이 격렬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같은 충격을 가해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게 ‘심상하게’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과학자들이 이 실험을 통해 밝혀내려고 한 것은 ‘신체적 충격에 반응하는 동물의 어떤 성질’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결과는 ‘동물은 신체적 충격을 계속 가하다보면 뇌는 그 충격에 무뎌진다.’정도가 아니었을까.
김금희의 소설 「보통의 시절」를 읽으면서 자연스레 이 ‘쥐 충격’ 실험이 떠올랐다. 바로 ‘쥐 충격’실험과 김금희의 소설이 ‘같은 주제’를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금희는 「보통의 시절」에서 이 시대에서는 “충격적인 일이 반복되면 그것은 보통의 일이 된다”는 사실을 아주 심상하게 들려준다. 과학자와 소설가 모두 인간을 탐구한다. 과학자들은 가설을 세워 실험을 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해서 인간을 이해하고, 소설가들은 인간을 관찰하고 그것을 이야기로 쓰면서 인간의 이해에 다다른다. 과학자와 소설가가 하는 일이 이렇게 닮았다는 점이 참으로 흥미롭지 않은가.
그렇다면, 소설 「보통의 시절」은 ‘보통이 아닌 일이 보통의 일’이 되는가를 어떻게 보여주는가.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소설이 바라본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짚어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작가가 보기에 이 시대는 ‘심상하지 않은 시대’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시대는 심상해져버린 시대가 되어버렸다. 충격적인 일을 보고도 보통의 일로 받아들이는 그야말로 ‘보통의 시대’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소설의 제목은 이러한 역설적 의미를 품고 있다. 예컨대 7,80년대 한국의 건물 중에는 “철근을 제대로 안 쓰고 콘트리트 정도도 무시하고 짓는 건물”들이 무너지는 일들이 많았는데, 그렇게 끔직한 일이 여기저기서 반복되다 보니까 사람들은 그저 “그런 일은 흔해”라고 말해버리고 그냥 심상하게 넘겨버린다. 충격을 충격으로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이 붕괴되는 어마어마한 사건이 벌어지고도 또 다시 무너지는 건물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정말로 “도시 전체가 허깨비다.”
소설 속 화자 ‘나’는 어린 시절 큰 오빠가 무서워서 심장이 멎을 것 같다가도, 큰 오빠의 화가 가라앉고 잠잠해지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오빠와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곤 했다. 작가는 그것을 “심상한 분노, 심상한 공포, 심상한 회복, 심상한 단맛”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심상함”이 반복되면 그 일은 ‘보통의 일’이 된다. 큰오빠가 동생들을 두드려 패는 일은 이제 늘 있는 ‘흔한 일’이 된다. 소설은 이렇게 ‘심상치 않은 시대를 심상하게 넘겨버리는 우리 시대’의 무감각과 무딘 시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고 한다.
소설은 화자 ‘나’가 성탄절에 가족들을 4년 만에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일찍 부모를 여읜 4남매는 그동안 험난한 삶의 수렁을 통과해 왔으며 이는 계속 진행 중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집안의 가장 역할을 했던 큰오빠는 직장 생활을 하다가 암 선고를 받았다. 큰오빠는 “평생 화가 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언니는 “사업도 망하고 취직도 못 하고 이혼도 당한” 세 명에 비해 “단 한 번 부침도 겪지 않은 사람”이지만, 언니는 자신의 인생이 여전히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이들 4남매가 4년 만에 만나서 어딘가로 향하는 이유는 김대춘이라는 인간을 만나 죄의 심판대에 세우기 위해서이다. 김대춘은 “보일러실에 불을 질러 부모님이 운영하던 목욕탕을 전소시킨 사람이다.” 그는 어린 4남매를 한 순간에 고아로 만들어버린 존재이다. 그 일로 큰 오빠는 어쩔 수 없이 열여섯 살에 가장이 되었다. 큰 오빠는 자신의 “인생이 왜 이렇게 됐나” 하는 울분 때문에 김대춘이 감옥에 있을 때는 “우리가 널 죽이러 가겠다.”라는 편지를 동생들과 함께 써서 보냈다. 이제 김대춘이 출옥했으므로 그를 만나러 가기위해 동생들을 불러 모은 것이다. 김대춘이 정말로 ‘죽을 죄’를 지은 죄인인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그것이 4남매에게 얼마나 크고 중대한 일이었는지를 본인에게도 알게 해야 큰 오빠는 마음의 평화를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복수는 ‘허망’하게 끝이 난다. 김대춘이 자신의 잘못을 부인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김대춘은 “자신은 목욕탕에 불을 지르지 않았으며, 그 당시 보일러실에서 그냥 잠이 들었고, 감옥에는 형사가 들어가라니까 들어간 거라고, 자신은 잘은 모른다.”고 말한다. 원수를 찾아갔다가 그가 원수가 아님을 확인하고 나오면서 큰 오빠는 말한다. “그래, 다 잊자.” 함께 따라간 ‘나’의 제자에게도 다 잊으라고 말한다. “상준이는 좀 단순한 아이니까, 함께 공부하고 농담하고 영화도 보면 다 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작가는 복수의 전말을 다 지켜본 상준이의 입을 빌려 말한다. “잊기는 어떻게 잊어요? 이미 봤는데 어떻게 잊어요? 이미 들었는데 어떻게 잊어요? 잊지는 못하고요. 누가 제일 나쁜 놈인가 그런 생각은 안 할게요. 그냥 이건 보통 일이 아닌 것 같고 난 머리가 나쁘니까 보통도 안 되는 놈이니까 지금은 생각해서 뭘 해요.” 과연 그렇다. ‘이미 보고 들은 일을 잊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중요한 일은 서둘러 ‘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일, 잘잘못의 엄중함을 따지는 게 아니라 그것이 ‘보통의 일’이라고 치부하지 않는 태도가 아닐까. “불행을 일반화, 불행을 평준화, 불행을 보편화해서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게 중요 한 게 아니라 불행한 일이 어떻게 보통의 일이 되는지를 기억하고, 그 촘촘한 표면을 감각하고 기억하는 일이, 앞으로 틀림없이 생겨나게 될 어떤 불행을 막는 일이 될 것이라는 것을 소설은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