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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행 Sep 24. 2020

최은영, 「쇼코의 미소」

인간 밖에 안 되는 주제에

한국 단편 문학 깊이 읽기 8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는 주변부로 밀린 우리 시대 청춘들의 이야기이다. 십대와 이십대를 불안하게 지나가는 소설 속 인물은 출렁거리는 인생의 다리를 아슬아슬하게 건너가는 중이다. 작가는 그 뒤를 담담히 따라가면서, 때로는 활기차고, 때로는 불안에 겁먹은 청춘들의 표정들을 포착하여 자세히 그려낸다. 예사롭지 않은 작가의 관찰력과 전달력은 바로 작가 자신도 그 흔들리는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라는 동질감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작가는 여러 아르바이트를 두루 거치는 중에도 시간을 쪼개 글을 쓰고 있으며, 그래도 자신은 일을 하며 글을 쓸 수 있어서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소설집 마지막에 실려 있는 작가의 말에서 그녀는 “이 생에서 진실로 하고 싶었던 일은 글쓰기뿐이었다. 망상이고 환상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라고 고백한다. 그런데 소설을 읽은 독자라면 작가의 모습이 소설 「쇼코의 미소」의 주인공 ‘소유’의 모습과 빼 닮았음을 어렵지 않게 알게 된다.         


이 이야기가 단순히 청춘들의 흔한 ‘실패담’으로 읽히지 않는 이유는 무엇보다 소설 속 인물이 ‘실패에 대처하는 방식’이 남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 ‘소유’는 자신의 욕망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본다. 욕망에서 생겨나는 불행을 나열하고 그것을 자신이 견뎌낼 수 있는 강단이 있는지 따져본다. 이렇게 ‘소유’는 꿈을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탐구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소유’는 5년 동안 꾸준히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있지만, 그 ‘꾸준히’가 영화감독으로의 데뷔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진즉에 깨달았다. 자신이 “창의적이지도 능동적이지도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니 욕망에 대한 허울이 걷히는 것을 인식한다. 그래서 뭐든지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거의 허언에 가까운 이 시대의 명령을 가차 없이 폐기시켜 버린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이 이 시대에 꿈같은 것은 아예 꾸지도 말라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은 아니다. ‘꿈을 꾸기 위해 전제되어야 할 것들, 그로인해 딸려 올 수 있는 불행들을 용인하고 잘라낼 수 있는지, 자신을 더 관찰’하라는 주문이다.      


17세 여고생 ‘나’, 소유는 엄마와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난 아빠와 직장생활 때문에 바쁜 엄마를 대신해 그녀를 업어 키운 사람은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평생 좋은 소리 한 번 하는 법 없이 무뚝뚝하기만 한 사람”이다. 소유에게 할아버지는 변치 않는 모습으로 늘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다. 이 둘은 가장 가까운 관계이기도 하지만 한 번도 서로의 속내를 내 비치지 않았으므로 또 그만큼 데면데면한 사이이기도 하다. 어느 날 이들 가족에게 일본인 쇼코가 오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된다. 고등학교에서 실행한 일본 자매학교 교육프로그램으로 소유의 집에 머물게 된 쇼코는 일본말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던 할아버지와 가까운 사이가 된다. 쇼코가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도 그들은 일본어와 영어로 각각 편지를 주고받는다. 쇼코와 할아버지의 친밀한 관계를 보면서 ‘나’는 자신도 몰랐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알게 된다. 할아버지가 손녀인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사실,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 꿈이 화가였다는 사실, 할아버지가 무뚝뚝한 이유는 단지 부끄럽기 때문이었다는 사실 등 이 모든 것은 쇼코를 통해 알게 된 할아버지의 진짜 모습이다.      


쇼코를 향한 ‘나’의 마음은 알 수 없이 들락날락한다. “내가 몰랐던 비밀을 할아버지와 공유했다는 질투, 내게 내내 연락하지 않았던 일에 대한 미운 마음, 일본에서 본 쇼코의 태도에 대한 거부감, 나의 불안정한 처지에 대한 방어심, 그 모든 감정들이 하나로 모여서 차가운 마음으로 굳어”지기도 하고, 약물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쇼코의 나약한 모습에서 ‘나’는 “자신이 쇼코보다 정신적으로 더 강하다”라는 우월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나’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었으므로, 답답한 쇼코의 삶과는 “전혀 다른, 자유롭고 생생하게” 산다는 자부가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자리를 잡는 친구들을 보고는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단지 돈과 안정만을 좇는다고”마음으로 비웃었다. “연봉이 많은 남자와 결혼하는 친구는 볼 것도 없이 속물이었고, 직장생활에서 서서히 영혼을 잃어간다고 고백하는 친구를 이해해 주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고소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은 꿈을 따라가기 때문에 누구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들의 삶은 무의미하고 ‘나’의 삶은 의미가 있는 삶이라고 자위했다. 그러나 현실은 여지없이 삶의 논리로 작동했다. ‘나’는 “늘 돈에 쫓겼고, 알바자리를 잡기 위해 애를 썼으며, 돈 문제에 지나치게 예민해졌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자신의 글이 “평생을 써도 아무 의미 없는 장면들만 만들어 내리라는 공포”였다. “순결한 꿈은 오로지 이 일을 즐기며 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이들의 것이었다.” “재능이 없는 이들이 꿈이라는 허울을 잡기 시작하는 순간, 그 허울은 천천히 삶을 좀 먹어간다”라는 사실을 ‘나’는 뼈아프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가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이 하나 더 있다. ‘인간은 불완전 하므로, 그런 주제에, 겨우 인간밖에 안 되는 주제에 완전한 미래를 계획하려고 했다니, 인간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너무 과대평가 해왔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다. 적어도 이제 ‘나’는 “창작이 자신에게 자유를 가져다줄 것이고, 나로부터 나를 해방시킬 것이고, 내가 머무는 세계의 한계를 부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꿈이 나를 속박하고, 나를 끊임없이 열등감에 시달리게 할 것이며, 하루에도 몇 번씩 천당과 지옥을 오가게 할 것이며, 매일 밥 먹듯이 불안을 삼키게 할 것이며, 그 사실은 너무나도 명백하다는 것에 고개를 끄떡인다. 그리고 그렇게 험난한 과정을 거쳐 정말로 꿈이 실현되는 날이 오더라도 그 영광과 기쁨은 잠시뿐이며 지속되지는 않으리라는 냉혹한 사실과 나아가 꿈을 이루든, 못 이루든 그건 그리 대단한 게 아니라는 냉담하기 그지없는 사실까지 받아들인다.     

 

우리 시대 꿈을 따라가는 것은 외면하고 싶은 이러한 현실들까지 껴안아야 한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애쓰는 자기 자신에게 너무 모질게 하지는 말라고 당부한다. 거듭 실패하는 자신이 모자라고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미워하고 부당하게”대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고 말이다. 왜냐면, 우리는 그저 ‘인간 밖에 안 되는 아직 미숙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미숙한 존재들끼리의 멸시와 혐오라는 말은 가당치 않다. 그러니, 따뜻하게, 진심으로, 깊게 서로를 바라보자. 미숙하더라도,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게 인간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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