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회복하는 인간>
더행의 한국문학 깊이 읽기
다정한 자매 사이였던 ‘당신’과 언니는 점점 멀어지다가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당신’과 언니가 완전히 갈라진 시점은 언니가 대학생이던 시절 소파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갔을 때 ‘당신’이 보호자로 따라가고 난 후부터다. 수술을 마치고 나온 언니는 ‘당신’이 그 “비밀을 언제까지나, 부모에게는 물론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고 끝까지 짊어질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언니는 ‘당신’의 눈을 피하기 시작했다. 언니는 ‘당신’과 말조차 섞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 후 수년간 ‘당신’은 언니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애써 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애틋했던 자매의 관계는 그걸로 끝이 났다.
어린 시절부터 ‘당신’과 언니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달랐다. 훤칠한 키에 이목구비가 뚜렷했던 언니는 예뻤지만 ‘당신’은 언니만큼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당신’이 언니를 질투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사실은 정반대였다. 언니는 ‘당신’의 “고지식하고 고집이 센 것을, 당신이 신통찮은 전공을 택한 것을, 서른을 넘기도록 제대로 된 연애 한번 해보지 못한 것을, 부모와 관계가 좋지 않아 경제적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한 것을.” 그런 불안정한 ‘당신’의 삶 모두를 언니는 부러워했다. ‘당신’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신’과 언니는 서로를 아끼고 좋아하면서도 자신에게 없는 부분을 상대에게서 발견하고 부러워했다. 그 둘은 서로가 비교의 대상인 동시에 욕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당신’은 언니의 삶에서 제 삶의 부족한 부분을 찾고 위로를 받았으며, 언니는 ‘당신’의 삶에서 제 삶의 치부를 발견하고 못 견뎌했다.
내가 욕망하는 대상이 불행해지는 걸 지켜보는 일은 한편으론 꽤나 짜릿한 일이라는 것을 소설은 보여준다. 다른 누구도 아닌 같은 자궁에서 태어난 피붙이 언니가 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당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기쁨을 소설은 포착한다. 언니가 암 선고를 받고 병원에 실려 다닐 때 ‘당신’은 “미칠 듯한 기쁨을 느꼈다”라고. 어떻게 가족끼리 그럴 수 있냐고? 그럴 수 있다고, 인간은 그럴 수 있는 존재라고, 소설은 답한다.
그러나 언니의 불행이 ‘당신’의 행복을 계속해서 충족시켜주지는 못했다. 병으로 죽어가는 언니를 보면서 ‘당신’이 언니에게 품은 미움과 행복도 동시에 멈췄다. 당연한 결과였다. ‘당신’의 미움과 행복은 언니의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니를 떠나보낸 후 ‘당신’은 알 수 없는 행동 하나를 반복한다. 자꾸만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당신’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잊어버리고, 산에서 비끗해서 점점 심해지는 발목의 통증도 잊어버린다. 그렇게 ‘당신’은 망각하는 인간이 되고 만다.
“당신은 자꾸 잊어버린다. 당신은 이미 잊었다. 자신이 얼마나 재치 있는 농담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는지, 나름으로 옷차림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는지 잊었다.”
‘자신을 잊는 것’과 동시에 ‘당신’은 어떠한 “기쁨도 느끼지 않는다.” 언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이후 ‘당신’은 더 이상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 되고 말았다. 당신이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회복되지 않게 해달라고” 중얼거리는 이유는 자신에게 내리는 벌(罰)이라고 해야 할까. 인간이 기쁨과 행복, 아픔과 슬픔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면, 어떤 의미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소설은 이렇게 섬세한 필치로 한 인간이 통각의 기능을 상실해가는 과정을 천천히 따라간다. 소설은 끝났고 우리는 남겨졌다. 이제 우리는 소설에 대한 어떤 대답을 마련해야 하는 의무를 느낀다. 우리의 미움과 행복은 어디를 향해있는지를, 그다음에는 무엇이 남게 되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