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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행 Feb 24. 2021

압도당하는 사람들

더행의 에세이


KBS <걸어서 세계 속으로>라는 프로에서 관광객을 가득 태운 배가 나이아가라 폭포 앞으로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엄청난 물보라를 일으키는 폭포는 위험천만해 보이는 데도 배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폭포의 바로 코앞까지 밀고 들어간다. 엄청난 수압으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배를 삼켜버릴 것 같지만 사람들은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듯 “아름다워요, 경이로워요”를 연발한다.   

   

물론 관광객을 태운 배가 전복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 만큼의 안전장치를 해 놨을 테니까. 또한 그 배에 탄 관광객들은 그 체험으로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얼마간의 돈으로 ‘안전한 공포’를 사서 그 순간의 짜릿한 느낌을 맛보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자연 앞에 압도 당하는 경험을 해보고 싶으니까.   

  

하지만 이런 안전장치 없이 정말로 욕망의 끝까지 가보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상황에서 구명조끼 하나 걸치지 않고 그 폭포의 소용돌이로 나아가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대개가 예술가들이다. 그 욕망의 끝은 죽음일 텐데, 예술가들은 그 사실을 알고도 끝까지 간다. 그리고 죽는다.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현하다가 죽은 예술가를 우리는 많이 알고 있다. 그들은 이렇게 계속하다가는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중간에 멈추고 돌아올 텐데 예술가는 끝까지 가서 바로 앞의 낭떠러지에 발을 디딘다. 그리고 그 아래로 기꺼이 추락한다.    

  

나는 늘 이런 예술가들의 삶이 궁금하다. 극단까지 자신을 밀어붙인다는 것은 무엇일까.      


정미경 소설에는 이렇게 욕망의 끝을 보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녀의 유작과 같은 <가수는 입을 다무네>도 한 예술가의 욕망과 그 끝을 그리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그녀의 삶도 소설과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는 암으로 투병하면서도 어떤 연명 치료도 거부한 채 마지막까지 소설을 쓰다가 생을 마감했다.   

   

나는 어딘가에 ‘인간은 중단하는 법을 알지 못 한다’라고 쓴 적이 있는데, 그것은 오히려 죽음을 두려워하는 태도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두렵다고 성급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정도는 다르지만, 꼭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중단하는 사람이 있고 끝까지 가보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이 있다.

나는 아무래도 후자 쪽인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좋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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