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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행 Mar 01. 2021

짖지 않는 개

한강,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

한 여자가 남자와 아이를 남겨두고 집을 나간다. 


여자가 집을 나가기 전 남자는 여자를 자주 의심하고 때렸다. 


여자가 동네의 한 젊은 남자와 눈을 맞추고 다정하게 웃어주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남자는 그 “연놈들”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리고 그들이 결국 자신 몰래 살림을 차릴 것만 같아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를 다그치다가 화를 참지 못해 주먹을 휘둘렀고 젊은 남자도 이유 없이 패주곤 했다. 그럴 때마다 여자는 이대로는 살 수 없다고 악다구니를 했다. 


남자는 여자가 자신을 못 견디고 떠날 것이 늘 불안했다. 그러니까 남자의 폭력은 자신의 두려움에서 생겨난 것이었는데 남자는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불쑥불쑥 올라오는 그 정체 모를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 남자는 더 험악해져야 했다. 두려움은 주먹을 휘두르는 것으로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것은 겁을 집어먹은 개가 더 크게 짖어대는 것과 같다고 소설은 설명한다. 그러나 그 방법은 효력이 신통치 못했다. 그때 뿐이었다. 남자는 점점 더 미쳐가기 시작했다..


아이도 남자와 똑같이 남겨진 존재였다. 엄마가 떠날 거라는 아이의 두려움이 남자의 것보다 작을 리 없었다. 그러나 아직 그런 두려움을 실감하기에 아이는 너무 어렸다. 아이는 “울지 않았고, 엄마가 곧 돌아올 것이라고 희망도 하지 않았다.” 아니, 희망이라는 것을 어떻게 하는지 몰랐을 것이다. 아이가 할 수 있는 일 이라고는 그 “연놈들”을 찾아 길길이 날뛰는 남자를 지켜보는 일 뿐이었다. 아이는 그저 무서웠다. 


아이는 아빠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한다. 


“어쩌면 그동안 아빠는 자신보다도 더 무서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줄곧 무서움을 참고 있었기 때문에 혼자서 더욱 무서웠는지도 모른다고.”


소설은 이렇게 두 사람이 갖는 ‘불안’의 정체를 각각 그린다. 남자가 점점 미쳐가는 모습을 따라가면서 그 안에 어떤 폭력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아무도 없는 여관에서 빵으로 끼니를 때우는 아이의 두려움이 무엇 인지를, 그 무늬를 그려보려고 애쓴다. 


남자의 ‘불안’은 그 “연놈들”을 잡아서 죽여야 끝이 날 것이다. 아이의 ‘불안’은 평생을 안고 가야 할 상처로 끝까지 살아남아 무심히 튀어나와 아이를 벼랑으로 몰아붙일 것이다. 남자가 가진 불안의 끝은 파멸이고, 아이가 가진 불안은 지워지지 않는 문신과 같다. 둘 다 각각의 인물에게 폭력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불안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그 안에 폭력성을 끌어안고 있다. 


앞으로 심하게 짖는 개를 보면 그 개가 겁을 먹은 게 아닌가 짐작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짖지 않는 개에게 어떤 문제가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늘 그렇듯 사람들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짖지 않는 개들이 분명 더 많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 세계의 비참은 이렇게 사소한 문제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사소한 문제는 이내 커지다가 폭발하고야 만다.


짖는 행위만이 불안의 징후일 수 없다. 나는 내 안에 짖지 않는 개를 생각한다. 내가 무엇인가에 몰두할 때, 그것이 내 안의 어떤 불안을 피하는 한 방식이 아닌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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