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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행 Mar 11. 2021

붉은 욕망

천운영, <바늘>

◉ 붉은 욕망

-천운영, 「바늘」 

   

욕망에 색깔이 있다면 아마 붉은색이 아닐까 싶다. 욕망이 지닌 그 뜨거움을 표현하는 데에 붉은색만 한 것은 없어 보인다. 욕망의 위태로움을 드러내는 것으로도 붉은색이 알맞다. 타오르다가 결국에는 그 자신까지 태워버리는 위험도 욕망 안에는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뜨겁게 타오르는 존재들은 대개가 아름답다. 욕망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므로 뜨겁고위태롭고아름다움을 지닌 욕망의 빛깔은 아무리 생각해도 붉은색이 가장 잘 어울린다.    

 

이런 붉은 욕망이 형체를 지닌다면 어떤 모양일까. 어찌 된 일인지 그런 욕망의 모양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아마 욕망은 화산이 폭발하기 직전의 끓어오르는 마그마와 비슷한 모양이지 않을까 하고. 내게 욕망의 형체는 흐릿하다.     

 

여기에 욕망의 모양새를 그리는 적당한 소설이 있다. 천운영의 소설 「바늘」이 그것이다. 천운영은 언어로 욕망의 한 형태를 그려 내는데 선수다. 아니, 탁월하다. 그는 큰 돌덩이를 깎고 쳐내면서 하나의 틀을 세운다. 그리고 갈고, 다듬으면서 비로소 욕망이라는 형체를 완성해 내는 언어의 조각가이다. 그의 손에 의해 관념 덩어리로 존재했던 욕망이 우리 앞에 제 모습을 드러낸다.      


소설의 주인공 ‘나’는 욕망을 충족하는 데에 실패한 사람이다. 그것은 부모로부터 시작된다.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부모에게 인정을 받거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부모에게 결정적으로 거부당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나’의 욕망은 시작부터가 잘못된 셈이다. 당연히 관철되지 않은 그 욕망은 ‘나’에게 상처가 된다. 그리고 상처받은 욕망은 복수를 꿈꾼다.     

 

그 복수는 붉은 욕망을 쫓아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녀가 사람들의 몸에 바늘로 문신을 뜨는 일을 하는 것도 욕망과 대면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곳에는 붉은피가 낭자하다. 그녀가 연약한 피부에 바늘을 찔러 넣어 문신을 뜰 때 사람들은 피를 흘리면서 고통스러워한다. 그녀의 고객들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그 고통을 참는다.     

 

바늘이라는 연장으로 사람의 연한 살갗을 뜨면서 상대의 타는 듯한 고통을 지켜보는 일에 ‘나’는 짜릿한 쾌감을 느낀다. 그녀는 거기에 자신의 욕망을 그려 넣는 것으로 상처를 회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나’의 복수는 생명체에 고통을 가하는 정도로 멈추지 않는다.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그녀가 가진 복수는 더욱 격렬하다.  ‘나’는 힘없는 생명체의 목숨을 끊어놓고 싶다. 그래서 ‘나’는 갓 태어난 새끼고양이를 훔쳐다가 잔혹하게 죽이는 일도 감행한다.      


이 잔혹한 욕망의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은 순서를 따른다.      


욕망---거부---상처---복수    

 

이것이 천운영이 소설「바늘」에서 보여주는 뜨겁고도 위험한, 결코 아름답지 않은 욕망의 실체이다. 문제는 저 복수는 끝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의 거부당한 욕망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체를 죽일지 모른다. 고양이를 한 번 죽였다고 해서 그 복수가 끝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죽이다 죽이다 죽일 대상이 없으면 제 자신을 죽일 것이다. 욕망이 종국에는 스스로를 태운다는 말의 의미가 이것이다. 연쇄살인범들이 감옥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죽일 대상이 없어진 연쇄살인범은 제 자신을 죽이는 것으로 욕망을 실현하려고 한다. 복수의 끝에는 그 자신이 있다.    

  

그렇다면 어디부터 잘 못 되었는지 한 번 따져보자. 복수 앞에 상처가 놓이고, 상처 앞에 거부가 놓인다. 그 앞에는 욕망이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나약하기 그지 없는 인간의 의지나 이성으로는 조절하기 힘든 것들이다. 그러므로 그 순서를 따지는 일은 무용하다. 참는다고 욕망과 상처와 복수심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쩌란 말인가. 우리는 참는 것은 잘 못하지만 그 정체를 알려는 시도는 할 수 있다. 폭발할 듯한 복수심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이 상처가 어떻게 덧났는지를 말이다. 일단 그 형체를 파악하고 알고 이해하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실마리가 보인다.  


이 소설은 욕망에서 시작해서 복수로 끝나는 상처와 복수의 행로를 보여주는 데 부족함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신경을 안정시키는 약물을 삼키는 일이 아니라, 먼저, 소설을 읽는 일이다. 관념으로 존재하는 욕망의 실체를 잡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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