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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행 Mar 27. 2021

인간이 폼잡고 할 수 있는 일

서유미, <당분간 인간>


◉ 인간이 ‘폼’잡고 할 수 있는 일

서유미, 「당분간 인간」


‘어쩌다’ 인간’이라든지, ‘아무튼’ 인간, ‘그래도’ 인간 같은, 이런 말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설명하는 언어로 자주 사용된다. 여기에는 우리가 이 세상에 ‘하필’ 인간으로 태어나서 겪게 되는 삶의 고달픔과 시대의 애환이 담겨있어서 공감이 간다. 그리고 어쨌거나 우리가 ‘인간’이라는 변치 않는 사실의 의미가 있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다움을 지키는 것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당분간만’ 인간이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우리가 인간이라는 단단한 사실의 차원을 넘어서 한정된 시간 동안만 인간이라는 이 소설 제목에 담긴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늘, 언제까지나, 의심의 여지 없이 언제나 인간이 아니었단 말인가. 끙.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보자. 


그러고 보니, 우리가 ‘당분간만’ 인간이라는 말에 동의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과연 우리는 당분간만 인간인 것이 맞다. 인간은 이곳에 머무는 동안에만 인간이고, 그 이전에는 또 이후에는 무엇이었고, 또 무엇이 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종교적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영적 세계를 말할 것이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이 세계로 한정된다. 그러므로 ‘당분간 인간’이라는 말은 인간의 탄생과 죽음, 삶 전체를 통찰하는 말과 같다. 


이렇게 작가는 우리가 평소 당연하게 생각하는 인간 존재에 대한 인식을 건들어 놓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소설의 인물 O는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 중이다. 고작 ‘당분간의 시간’ 동안만 살겠다는 데도 이 세계는 O에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마이너스 통장과 신용카드에 의지해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는” O는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 사람에게서 받는 상처로 하루하루가 힘겹다. 그런데도 O는 잘 참고 견딘다. 그 누구에게도 피해나 상처를 입히지 않으면서 혼자 힘으로 그래도 버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O의 피부가 마르고 딱딱하게 굳고 갈라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몸 곳곳에서 부스러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O를 보면서 보이지 않는 인상을 썼고, 그가 지나가고 나면 바닥에 떨어진 부스럼 가루를 치우기 위해 청소기를 꺼내서 돌렸다. 


그런데 친구 Q는 O와는 정반대 성향의 사람이었다. O가 묵묵히 삶에서 생겨나는 불화를 혼자 참고 견뎌내는 사람이라면, Q는 앞서서 해결하는 사람이었다. Q는 자신에게 피해가 될 만한 것은 쳐내고, 없애버리는 방식으로 살았다. 자신의 집에 잠깐 기거하는 O를 집으로 다시 돌려보내기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하는 것도 O가 아닌 Q이다. 그러니까 O는 부스러지고 있는 사람이고, Q는 악착 같이 사는 사람이다. 이렇게 다른 사람이지만 O와 Q가 불리는 것은 겨우 획(점) 하나 차이라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결국 O는 몸 전부가 부스러져 가루가 되고 만다. 그런데 가루가 되어버린 친구 O를 Q는 알아보지 못하고, 이 “부스러기를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여야 할지 빗자루로 쓸어담아야 할지를 고민”하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이 살벌한 세계에서 누군가는 부스러지는 중이고, 또 누군가는 안간힘을 쓰면서 삶을 버티는 중일 것이다. 그러나 어느 세계에서나 부스러지는 존재들이 더 많은 법이다. 보이는 것에만 화들짝 반응할 줄 아는 사람들은 그동안 부서져서 가루가 된 그 존재들을 잘 몰라봤던 것은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자신은 가루가 될 리 없다는 거의 허언에 가까운 망상에 사로잡혀 사는 것은 아닐까. 이렇든 저렇든 이 세계의 모든 인간은 ‘당분간만 인간’일 뿐이다. 이런 전제 하에 다시 질문을 던져보자. 가루가 된 나를 아무도 알아봐 주지 못하는 세계는 과연 인간이 살만한 곳인가, 라고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실수는 그 부스러진 존재들을 진공청소기로 홀랑 빨아들이고 나서 만족해 하는 일일 것이다. 이 세계에서 인간의 존엄은 인간만이 지켜낼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 겨우 ‘당분간만’ 살아가는 이 지구에서 인간이 ‘폼’ 잡고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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