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감정의 층위 탐색
세르게이 도블라또프의 소설 『여행가방』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나는 누군가에게 돈을 빌릴 때마다, 상대가 거절하기 쉽도록 조금은 거리낌 없는 말투로 말하고는 했다.” 어떻게 해서든 돈을 마련해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한 인간의 마음은 조급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타인의 입장보다는 자신을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인물은 상대방이 자신의 부탁을 거절했을 때, 어떤 무안함이나 미안함을 느끼지 않도록 일부러 시시껄렁한 말투로 ‘네가 돈을 안 빌려줘도 괜찮다’는 태도를 취한다. 거절 했을 때, 상대가 느끼는 마음의 짐을 덜어주려는 것이다. 소설은 이렇게 아무리 다급한 상황에 처한 인물에게도 다른 마음의 층위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소설을 읽는 일이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감정의 겹들을 하나하나 더듬어 가는 일이다. 절박한 상황에서도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길러내는 일, 이것이 인간이 끝까지 갖추어야 할 품격이 아닐까. 내가 다급한 상황이어도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나 먼저 살고보자’라는 것이 인간이 가진 보편심리가 아닌가. 소설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앎과 삶을 일치시키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소설 읽기는 타인을 자세히 관찰하고 배려할 수 있는 마음자리를 키우는 일이다.
문학 작품을 읽으면 한 삶의 내적 관점에 대해서도 우리의 공감 능력이 성장합니다. 우리는 정신적 정체성의 성공과 실패, 발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결정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 실패하면 어떻게 해서 실패하는 것인지도 알 수 있지요. 문학작품을 읽음으로써 이러한 현상이 어떻게 생성되는지에 대한 이해가 깊어가는 것은 자기 결정을 추구하고,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자문하는 사람에게 결정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이러한 질문의 답은 오직 여유로운 가능성의 장 안에서 여러 가지로 입장을 바꿔보는 정신적 활동을 할 때에만 얻을 수 있습니다. (피터 비에리, 『자기결정』, 은행나무)
-더행, [소설 재미있게 읽는 법]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