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창들이여 미국으로 가라
멸치. 마르고 작은 남자를 지칭하는 용어. 멸치 같은 외모에서 벗어나고 싶어 시작한 헬스가 어느덧 뗄 수 없는 취미이자 습관이 된 지 30여 년. 마흔 중반의 남편은 누가 보아도 저 사람 운동 좀 하는구나 테가 나는 건장한 몸매의 소유자다. 남편이 자기 관리를 잘하니 좋겠어요. 운동을 열심히 하는 걸 보면 부지런할 테죠. 흔히들 하는 오해에 나는 항상 정색할 수밖에 없다. 아니요, 절대 절대 아니요.
일단 근육덩어리 울퉁불퉁한 몸은 전혀 내 취향이 아니다. 마른 몸매에 살짝 드러나는 근육이라면 두 팔 벌려 환영이지만, 아널드 슈왈츠제네거와 똑 닮은 그의 큰 근육은 철 지난 아저씨의 그것 같은 느낌뿐이다. 그뿐인가. 아이가 일곱 살이 된 요즘은 한 침대에서도 이불을 따로 덮고 자지만, 우리가 아직 신혼 무렵 팔베개라도 하고 잘라치면 근육 때문에 딱딱하고 너무 높아 결국엔 밀쳐내고야 말았다. 외양은 세상 튼튼한데 속은 부실해서 툭하면 잔병치레. 30kg씩 되는 중량 기구들은 번쩍번쩍 들면서 10kg도 되지 않는 아이는 조금만 안아도 힘이 들다며 엄살이었다.
무엇보다 최악은 그의 야행성과 천성적 게으름이 헬스 중독과 맞물려 만들어 낸 환장의 콜라보다. 스케줄러에 밀리지 않고 해야 할 운동 목록이 빼곡히 적혀있지만, 미룰 수 있는 만큼 미루는 것이 최대한의 미덕이라는 가치관을 몸소 실천하는 남편의 운동은 늘 빨라야 밤 11시에 시작된다. 두어 시간 가까이 운동을 하고 나면 긴장한 근육을 충분히 풀고 자야 한다며 새벽 3,4시는 되어야 취침. 당연히 다음 날 아침은 느지막이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시작된다.
코로나로 헬스장에 가지 못하는 요즘 남편에게는 불행한 일이겠지만, 그나마 나는 신경 쓸거리가 조금은 줄었다. 미국에서는 24시간 운영하는 헬스장 덕분에 자정 가까운 시간에 나간 남편이 혹여나 총기 사고 같은 험한 일에 휩쓸리지나 않을까 불안해 그가 돌아오는 시간까지 나도 같이 잠들지 못하는 밤의 연속이었다.
그의 운동은 여행을 가서도 절대 멈추지 않는다. 여행지의 숙소는 그가 하는 헬스기구가 갖춰져 있고, 늦은 시간까지 운영하는 헬스장이 있는 곳이어야만 한다. 여행지에 갔으면 낮에는 여행을 해야 하니 조금 바지런 떨어 아침 일찍 운동을 하고 오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아니 심지어 존경할 것도 같다. 그것이야말로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하는 멋진 남자의 모습이 아닌가. 신혼여행으로 간 풀빌라에 갓 결혼한 신부 혼자 덜렁 두고 매일 같이 헬스장에 다녀오는 것으로 시작된 남편의 여행 중 운동은 나라를 가리지 않았다.
그중 최고는 스페인-포르투갈 여행. 대부분 숙소를 에어비앤비로 잡아 늘 그래 왔던 것처럼 호텔 헬스장을 이용할 수 없는 2주간의 여행이었다. 밤마다 열심히 무언가를 검색하고 있어 보면 여행지가 아닌 헬스장. 인터넷도 뚝뚝 끊기는데 어떻게든 1일 이용이 가능한 헬스장들을 찾아냈다. '가족은 늘 함께해야지' 주장하며 아이와 단 둘이 외출은 거부하면서, 어떻게 낯선 여행지에 아내와 금쪽같이 아끼는 딸만 덜렁 두고 운동을 할 수 있었는지 그의 이중적인 잣대의 기준이 나는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 남편에게 있어서 미국은 최소한 헬스장 때문에라도 환상의 나라였을 테다. 사실 미국에서 살기 전에는 장소와 계절 상관없이 민소매에 반바지 차림으로 조깅을 하는 서양인들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했다. 미국 생활을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남편의 체중은 앞자리가 바뀌었다. 아! 오해는 말자. 미국에 도착해 그가 가장 먼저 혼자서 처리한 건 헬스장 등록이었으니 늘 하던 운동을 하지 못해 그런 건 절대 아니다.
다만 어느 곳이던 차로 이동을 하다 보니 집에서 주차장, 주차장에서 목적지 정도로 확연히 줄어버린 활동량이 문제였다. 매일 시간을 내어 일부러라도 움직여야만 한다. 걷는 대신 차로 이동하는 생활환경에서 움직이기 위해 누군가는 조깅을 선택했다면, 남편은 헬스장에서 근력 운동 외에 유산소 운동을 더 하는 것으로 방향을 정했다. 비록 헬스장도 차로 이동해야 했지만, 그렇게라도 부러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앞 자릿수가 한 번 더 바뀌는 것도 가능할 듯싶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미국은 헬스장이 지천에 있다. 심지어 가격은 비슷한 기구를 갖춘 한국의 헬스장과 비교하면 무려 3분의 1 이상 저렴하다(물론 가입비만 200달러에, 월 이용료도 200달러 가까이 되는 고급 피트니스 체인도 있다). 거대한 땅덩어리 덕분인지 헬스장의 규모도 일단 무조건 크다. 그뿐인가. 그런 헬스장들이 거대 기업을 만들어 수백 개 이상의 체인 점포를 가진 헬스클럽이 여럿이다.
남편이 이용한 미국 헬스클럽은 저렴한 가격에 운동 초보자라도 누구나 이용 가능하다 홍보하는 보급형 체인임에도, 내가 아는 한국의 헬스장들보다 규모나 기기 구성면에서 훨씬 뛰어났다. 지불하는 금액에 따라 같은 체인의 헬스장이라면 전국 아니 전 세계 어디에서건 동일하게 방문해 이용할 수 있다. 한국의 헬스장처럼 하나의 점포만 이용한다면 월 만원 돈이면 충분하다.
남편은 Planet Fitness라는 헬스클럽을 이용했는데, 1992년 미국 뉴햄프셔에서 시작한 회사는 현재 미국 내 48개 주에 1천여 곳의 점포를 보유하고 있다.
미국 국경을 넘어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러 가서도 남편은 본인이 이용하는 미국 피트니스 클럽의 회원권을 이용해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운동을 했다. 그러니 홈페이지에 당당히 써놓았겠지. "Use of Any Planet Fitness Worldwide"라고. 멤버십 프로그램 종류에 따라 가입비는 10~30달러, 월 이용료는 최소 10달러에서 전 세계 체인 이용 가능한 고급 프로그램도 25달러 미만으로 정말 매우 매우 저렴하다. 가격이 저 정도로 저렴하고 보급형 헬스클럽이니 별로일 거라고? 잊지 마시길. 내 남편은 헬스만 30년 가까이 꾸준히 해 온 준 전문가이고, 그가 200% 만족하며 2년 동안 이용한 곳이다. 물론 그가 가장 만족한 부분은 대부분 24시간 운영한다는 점이기는 했다. 야행성인 헬스 중독자에게 미국은 천국이었다.
고작 2년 살아 본 헬스 중독자의 증언만으로는 부족하다면 잭 라레인의 도움을 받아 권해 본다. 오늘날 헬스클럽의 전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미국 최초의 헬스장을 1936년에 열었던 잭 라레인 (최초의 헬스장은 1865년 스웨덴에 생겼지만, 운동보다는 물리치료를 위한 공간에 더 가까웠다). 잭은 PT체조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점핑 잭' 운동과 최초의 식사대용 음료는 물론, 헬스장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각종 머신들의 표준이 되는 기구들을 고안해냈다. 세계 최초이자 가장 장수한 피트니스 TV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피트니스가 중심이 된 삶을 살았던 잭. 그런 잭의 나라 미국. 그러니 헬창들이여 미국으로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