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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하바 Oct 22. 2021

도서관에 도시락 싸서 놀러 가자

나와 아이가 사랑한 미국 도서관들


"얘가 어릴 때 하도 책을 좋아해서 그만 읽고 자라고 하면 이불 속에 들어가서 몰래 손전등 켜고 책을 봤다니까요." 내 어린 시절을 이야기할 때면 가장 자주 나오는 엄마의 레퍼토리다. 고3 때도 수능 공부 대신 역사소설들에 빠져서 매일 같이 도서관을 방문하는 나를 선생님이 걱정하실 정도였다. 


그때의 그 문학소녀는 어디로 간 건지, 어린 시절 에피소드는 꺼내기도 부끄러울 만큼 나의 책사랑은 시들해져 버렸지만 그럼에도 도서관은 항상 좋았다. 낡은 책과 새 책들이 섞여서 만들어내는 종이와 먼지 냄새. 당장 읽지는 않더라도 언젠가는 읽고 말겠다는 도전의식을 갖게 하는 수많은 책들. 열의 여덟은 한 권도 제대로 읽기도 어려웠지만, 대출권수 꽉꽉 채워 두 손 무겁게 도서관에서 나올 때의 기분은 뿌듯함 이상의 만족스러움을 가져다주었다. 


미국에 도착해서도 근처 도서관부터 검색해 두었다. 아직 미국 운전면허를 따기 전이라 도보로 40여분. 공동묘지 옆 사람 하나 없는 길을 지나야 하는 루트였지만, 그래도 기어코 한여름 땡볕에 유모차를 끌고 도서관부터 찾았다. 나중에 보니 우리 동네 도서관은 미국에서 가 본 모든 도서관 중에 가장 열악했지만, 그때는 그마저도 마냥 놀라웠다. 요즘에야 한국에도 어린이도서관이 많이 생겼고, 특히나 신도시의 도서관들은 시설부터 프로그램까지 모두 엄청나지만, 우리가 유독 아이들을 위한 배려는 거의 없었던 남산도서관과 용산도서관이 있는 동네에서 살았던 때문이었을 테다. 


열람실에서도 자유롭게 음식 섭취가 가능하고, 대화도 하는 미국의 도서관은 도서관이라기보다는 북카페 같은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규모가 작은 동네 도서관이었음에도 일반 열람실 못지않은 크기의 어린이/청소년 열람실이 따로 갖춰져 있다는 것에 감탄했다. 아주 어린 연령의 아이들도 도서관을 즐길 수 있도록 인형이나 놀잇감도 한편에 준비되어 있었다. 사서가 앉아 있는 카운터에는 컬러링 페이지나 워크시트가 준비되어 누구나 이용할 수 있고, 무료 프로그램들은 너무나 다양해 골라서 참여해야 할 정도였다. 




도서관 열람실과 유아실


다녀 본 도서관들 중 가장 좋아했던 곳은 프린스턴 공립 도서관. 프린스턴 공립 도서관은 한 층 전체를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공간으로 꾸며두었다. 특히나 kids activity room이라고 만들어진 방은, 블록놀이부터 주방놀이, 교구들까지 키즈카페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잘 꾸며져 있었다. 사서에게 물어보니 이 공간은 어릴 때부터 도서관과 친숙해지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이라 했다. 실제로 아주 어린 연령의 아이들부터 학생들까지 각자의 방식으로 도서관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사실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 아예 건물 하나를 통째로 사용하는 어린이 도서관을 방문했을 땐, 처음 미국 도서관을 접했을 때보다 더한 감동을 받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미국의 어린이 도서관이 부러웠다. 왜일까? 한국의 어린이 도서관은 어려웠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조심스럽다고 하면 좋을까? 분명 영유아들을 위한 공간이라고 만들어 두었지만, 주위가 너무나 조용하니 책을 읽어주는 것도 조심스럽다. 아이가 떼를 쓰기라도 하면 엄마는 주위 눈치를 살피며 황급히 아이를 안고 열람실 밖으로 뛰어나간다. 


미국 도서관에서 아이가 운다면? 누구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는 사람은 어떡하냐고? 조용한 공간이 필요한 사람이 지정된 공간에 자리를 잡으면 된다. 아이들을 위한 공간은 철저히 아이들 위주였다. 놀이하며 웃고 떠들고, 집에서 준비해 간 먹거리나 아예 열람실 한편에 마련된 스낵 자판기에서 간식을 구매해 먹으며 책 읽고 놀아도 되는 곳. 그러니 아이들은 도서관을 좋아한다. 도서관은 책도 보고, 장난감도 가지고 놀고, 간식도 먹고, 각종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하고, 친구와 만나기도 하는 그야말로 아이들을 위한 복합 문화공간인 셈이다. 





유아와 어린이들을 위한 배려 이외에 또 놀라웠던 건 도서관 열람실에 구비된 PC에도 게임이 설치되어 있고, 아이들은 어떤 제한도 받지 않고 컴퓨터를 이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얼마 전 다녀온 어린이/청소년 도서관에서 PC를 사용하려니 사서에게 먼저 이야기하고 제한 시간을 받는 것은 기본이요, 기본 인터넷이나 문서 프로그램 이외에 다른 프로그램을 설치하지 말아 달라, 너무 오래 컴퓨터를 사용하지 말아라 등등. 이런저런 제한들을 받으며 또 한 번 큰 차이를 느꼈다. 


어려서부터 도서관을 놀이하는 곳처럼 편하게 찾던 미국 아이들은, 청소년기가 되어서도 그들에게 익숙한 미디어, 인터넷 등을 이용하기 위해 도서관을 찾는다. 눈 가는 곳에 마음 간다고 도서관을 자주 찾다 보면, 책도 많이 읽게 되는 건 아닐까? 입시 위주의 교육 정책 때문이기는 하겠지만, 상위 교육기관으로 올라갈수록 독서량이 줄어드는 우리나라 청소년들 독서실태 그래프를 보자면 도서관 이용 문화의 차이도 어느 정도는 영향이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아이들에게만 좋은 도서관이냐고? 물론 아니다. 내가 수험생이거나 공부하러 도서관을 찾는 입장이었다면 조금 달랐을지 모르겠지만, 커피 한 잔 마시며 창가 소파에 앉아 책 읽으며 유치원에 간 아이를 기다리는 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이었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차로 고속도로를 20여분 달려야 갈 수 있는 아이의 유치원 바로 앞에는 예쁜 호수를 품은 도서관이 있었다. 뉴저지는 수많은 이민자들의 도시인만큼 작은 도서관이지만 다양한 나라의 언어로 된 책들이 제법 잘 갖춰져 있었다. 읽고 싶었지만 육아로 바빠 읽지 못했던 한국 책들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란! 고작 5개월만 보내고 유치원에 더 이상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을 때 아쉬웠던 건 아이 영어가 늘 수 있는 기회가 아니라, 고작 2시간이지만 도서관에서 읽고 싶은 책에 파묻혀 보낼 수 있는 사랑하는 시간을 더 이상 가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여전히 나는 도서관을 사랑한다. 코로나로 도서관에서 열람하는 것조차 어려운 요즘을 살다 보니, 도서관을 제 집처럼 드나들던 그때가 더욱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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