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염려증 남편에게 미국 병원이란
감사하게도 두통과 소화불량을 끼고 살지만, 큰 병 한 번 앓아보지 않은 나에게 병원은 가까운 곳이 아니었다. 잔병치레가 잦지만 병원은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 정말 아플 때나 가는 남편도 비슷했다. 아이가 태어난 후 그가 180도 병원친화형 인간으로 바뀌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이가 평소와 조금만 달라도 남편은 우리를 병원으로 보냈다. 출근 후에는 원격 조정을 했다. 동네 소아과는 대기 인원이 항상 많으니 주말이면 다른 동네까지 원정 방문도 불사했다.
미국에서도 처음에는 꼭 같았다. 다만 50분 거리 북부 뉴저지의 한인 타운, 한인 병원까지 가기는 싫으니 학교 주위의, 예약 없이 방문 가능한 소아과들을 어떻게든 찾아냈다. 틀리더라도 일단 영어를 내뱉는 건 의외로 잘하는 남편은 말은 했지만 잘 듣지 못했고, 리스닝은 잘하는데 원하는 말이 순간적으로 잘 나오지 않는 나는 말을 못 했다. 기침만 살짝 해도 일단 약부터 지어주고, 원하면 항생제 처방도 손쉬운 한국과 달리 자주 병원에 갔지만 약 처방은 드문 일이었다. 기껏 처방받은 약이라는 것도 사실상 over-the-counter medication(마트나 약국에서 처방전 없이 자유롭게 구매 가능한 약이나 건강식품)이다. 다녀오면 뚝 떨어진 자존감을 추스르는 것만도 힘든데, 딱히 성과(?)도 없는 날이 많았다.
그나마 한국의사가 운영하는 한국병원은 조금은 달랐다. 병원이라는 곳이 본래 마냥 편하지는 않은데 낯선 의학용어들이 등장하는 외국인 의사와의 영어 대화를 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실 충분했다. 그제야 어릴 때부터 유학생활을 해 영어를 편하게 사용하는 주위 사람들이 왜 가급적 한인병원을 찾는지 이해가 갔다. 남편이 대상포진으로 제대로 걷지 못할 때도, 내가 손가락 관절염으로 고생할 때도 소아과 보다도 더 어려운 용어가 난무할 게 뻔한 증상들에 마음 편히 한국인 의사가 있는 병원을 예약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학교 보험에 가입되어 있는 덕에 복잡한 미국 의료시스템에서 최상위급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거기에 동일 상병으로 일정 금액 이상의 치료가 발생할 경우 한국의 회사에서 비용 지원도 되니 병원 문턱이 높지 않은 것만도 감사했다.
미국 생활 중 병원과 관련한 두 번의 위기는 모두 아이의 알레르기 때문이었다. 이유식을 하던 때 시금치, 단호박, 덜 익힌 달걀을 섭취한 후 입 주위로 살짝 올라온 피부발진으로 병원을 찾았었다. 아직 어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비염과 알레르기가 있는 아빠 체질을 닮아 알레르기 체질일 거라 했다. 상태가 심하지 않기도 했고, 자라며 세 가지 음식 모두 괜찮아졌기에 방심하고 있다 미국에서 된통 당했다.
식당에서 처음 먹은 딸기우유 때문인지, 친구 집에서 처음 먹은 실란트로가 들어간 만두 혹은 아가베 시럽 때문인지 이유는 확실치 않다. 하필 남편은 저녁 수업이라 집에도 없고 차도 없는 상황. 너무 급작스럽게 전신에 발진과 홍반이 생기고 아이는 너무 가려워요, 너무 아파요 울며 온 몸을 긁어 댄다. 옷을 벗기고 찬물에 적신 수건으로 몸을 닦아냈다.
알레르기로 기도까지 부어오르면 안 되니 아이 상태를 살피며 다른 한 손으로는 urgent care를 검색하고, 미국 맘 카페에 문의 글을 올렸다. 머릿속은 발진이니 음식 알레르기니 하는 영어 단어들을 고민하며 911을 불러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로 아이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한국이었으면 당장 어느 병원이라도 뛰어갔을 텐데 낯선 나라의 복잡한 의료환경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오히려 남편이 응급실이라도 가자는 나를 달랬다. 병원에 가봐야 의사가 별다른 조치를 해주지 않을 거라는 경험으로부터의 학습이었을 거다. 병원 대신 약을 사러 간 마트에서 찬물 수건으로 어느 정도는 회복된 아이는 신이 나 제 장난감까지 획득해 왔다. 다음 날 예약해 찾아간 병원에서도 우리가 구매한 것과 상표만 다른 알레르기약을 처방해 줬을 뿐 역시나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알레르기에서 땀띠로 이어진 2주 간의 피 말리는 알레르기 이후로 우리 집에는 상비약 바구니가 하나 더 늘어났다.
두 번째 알레르기는 스페인 여행을 위해 공항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시작됐다. 해열제나 감기약은 챙겼지만 알레르기약은 생각도 못했다. 비행시간도 빠듯하게 남았는데 공항 내에 약을 파는 곳도 없단다. 아이는 꼼짝없이 비행기에서도, 말라가 공항에서 론다까지 이동하는 차 안에서도 가려워 울어댔다. 하필 출국 전 목에 담이 온 남편은 파스를 덕지덕지 붙이고 간신히 운전은 했는데, 숙소에 도착하자 이제는 물도 삼키지 못하겠다며 식음을 전폐하고 누웠다. 햇반과 3분 요리로 간신히 뭐라도 먹이고 수건 찜질을 해주자 아이도 안겨 잠이 들었다. 여행이고 뭐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한국도 아니고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두 사람이 조금쯤 기운을 차리자 일단 약국을 찾았다. 통하지 않는 영어로 간신히 이해는 했는데, 알레르기약은 그냥 줄 수 없단다. 의사의 처방을 받아오란다. 한국에서 출발하는 해외여행에는 으레 여행자보험을 가입했다. 하지만 우리는 여행자보험도 가입하지 않았다. 미국과는 다른 의료 시스템을 갖춘 곳에서 또 병원이다. 중국, 필리핀, 영국 세 번의 해외생활 동안 병원 한 번 가지 않아도 됐던 건강한 몸을 주신 부모님께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관광은 언감생심. 낯선 병원 대기실에서 아파하는 아이를 안고 벽에 걸린 사진들로 론다를 둘러봤다. 우리보다 더 당황한 스페인 의사는 기본적인 영어 단어도 생각나지 않았던지 주사는 필요 없다는 말을 손가락으로 팔을 쿡 찌르며 '삐융 삐융, 노' 하고는 제 스스로도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었다. 다행히 아이의 알레르기는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을 먹고 3일 만에 괜찮아졌다. 남편의 목에 걸린 담은 알레르기보다 오래갔다. 진통제, 테이프, 파스 등등 여행지마다 약국을 들러 종류별로 약을 샀다. 정말 다행히도 여행 7일째 우연히 들린 포르투갈 약국에서 남편을 보자마자 자신의 목을 잡아 보이던 명의 뺨치는 약사가 내어 준 약을 먹고 바로 괜찮아졌다.
우리 집 상비약에 근육통 약 혹은 염증약이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미국에서 더 이상 남편은 아이가 아프다고 해도 바로 병원에 가보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아이 알레르기 약을 포함해 우리들이 먹을 상비약과 영양제들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어지간한 병은 의사를 찾는 대신 스스로 정보를 찾아 약국에 가 약을 샀다.
물론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 남편은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다시 병원친화형 인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