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 시작
하이.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고 서로 눈치를 살핀다. 아직 윗머리가 듬성듬성 난 딸이 타고 있는 유모차를 미는 그녀의 국적이 확실하지가 않다. 패밀리 기숙사에 거주하는 가족들의 국적은 다양했다. 멀리 아프리카부터 중동, 유럽, 중국인이 80% 이상을 차지하지만 동양인들까지. 동양인임은 확실한데 어느 나라 사람일까? 우리 넷의 눈동자는 바쁘게 움직였다. 눈동자들은 서로를 스캔하고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시간 1분. 20% 확률로 한국인일 가능성을 점치고 있는 사이 아이가 입을 열었다. "엄마, 왜?"
"어머, 한국인이시죠?" 우리의 국적을 확인한 그녀의 목소리는 하이톤으로 반가움을 가득 담고 있었다. 2년 동안의 미국 생활은 물론 아직까지도 우리 가족 모두에게 참 소중한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놀이터에서. 그날 우리는 몇 마디 신상을 교환하는 대화를 나눴고, 어른들보다 더 어색하고 부끄러워하는 아이들을 핑계로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번호를 받아가며 그녀는 "언제 한 번 우리 집으로 놀러 와요" 인사를 남겼다.
언제 한 번 연락해요. 언제 한 번 같이 밥이나 먹어요.
새로운 사람을 알게 되었을 때, 언제에 대한 기약은 없이 안부를 묻는 가벼운 인사. 한국식 기약 없는 약속 인사에 "언제 한 번 집으로 놀러 와요."는 없었다. 적어도 내가 맺어왔던 삼십몇 년의 관계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집으로 초대를 받는 일은 없었다. 분명 그랬다.
초대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그 후로도 몇 번쯤 그녀의 초대를 예의 바르게 거절했었다. 몇 달 시간이 흐르고, 더 많은 인연을 만들어 가면서 미국인들에게 혹은 미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집으로의 초대는 내가 느낀 것만큼 부담스럽고 무거운 약속이 아님을 알게 되었지만 그녀의 초대에 응하기 위해 나는 제법 용기를 내어야만 했다. 함께 있으면 어색한 시간이 더 많은 사람의 집이라니. 그리고 실제 첫 번째 방문은 즐거움보다는 불편함이 더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알고 보니 아이들은 11개월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한국 나이로는 친구. 알고 보니 남편들은 전공이 같다.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그녀의 남편에게 내 남편의 한국 대기업 근무 경력은 좋은 연구 거리였고, 석사생이 같은 학과 박사생을 알고 있다는 건 당연히 큰 도움이 되었다. 아이들은 그야말로 영혼의 단짝,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아이들 덕분에 어른들이 반강제적으로 함께하는 시간도 많았다. 나는 어땠느냐고? 성인이 되고 나서 만난 모든 인연을 통틀어 가장 소중한 사람을 얻게 되었다. 그날 놀이터에서 일본인인가 싶어 걱정하면서도 먼저 인사를 건넨 그때의 나를 칭찬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집순이 딸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차를 타고 멀리 가는 건 거의 대부분 거절했다. 반면 집 앞 놀이터는 매일, 하루에 몇 번이라도 나가고 싶어 했다. 아이를 따라 놀이터를 서성이다 보니 놀이터 앞 건물들에는 누가 사는지, 주로 몇 시에 사람이 있는지 자연스레 알게 됐다. 비슷한 시간에 자주 마주치는 아이와는 서로 인사를 건네게 되었다. 놀이터 옆에 바비큐가 가능한 테이블이 있어 가끔은 구경도 하고, 우리가 테이블에서 뭔가를 먹고 있을 때 관심 보이는 아이들에게는 한국 음식을 나눠주기도 했다. 블로그를 오래 하다 보니 한국에서 단체로 연수과정을 온 어느 분은 먼저 인사를 걸기도 했다. 한국에서부터 도움 많이 받았다고. 감사하다고. 어느 동네 건, 어느 아파트건 아이 있는 사람들의 교류는 놀이터를 거쳐 이뤄질 때가 많다. 학원이나 아이들 활동 가능한 정보들을 공유하며 동지 의식이 생겨난다.
2년을 살며 매일 같이 놀이터에 나갔어도 아이 또래의 한국 아이를 놀이터에서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알고 보니 내 딸과 그녀의 딸이 이 기숙사 전체를 통틀어 유일한 3살 한국인 아이들이었다. 늘 그렇듯 혼자서 아이 재우러 산책을 하던 그녀는 "한국인처럼 보이는 딸 또래의 아이를 보고" 부러 발걸음을 돌려 놀이터로 왔단다. 참 인연이다. 기숙사로 이사 온 지 3일 만에 평생의 인연이 될 소중한 사람을 놀이터에서 만났다는 것이. 그녀는 종종 이야기했다. 꼭 그날이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결국 알게 되었을 인연이라고. 남편들 전공이 같으니 어떻게든 만날 기회가 있었을 거다. 하지만 생각한다. "놀이터"에서 "아이"를 중심으로 맺은 인연이라 더 쉬이 가까워질 수 있었던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