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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하바 Aug 05. 2021

미국 대학교 패밀리 기숙사는 조금 달랐다.

제가 기숙사 생활은 좀 합니다만?



그렇다. 나는 기숙사 생활에 매우 익숙한 사람이다. 고등학생 때는 3년 내내 기숙사에서 살았고, 결혼 직전 다녔던 영국의 학교에서도 나는 기숙사에 머물렀었다. 세탁실, 식당은 물론 사방이 뻥 뚫린 샤워실 등을 공유해야 하는 가장 원시적 형태의 고등학교 기숙사는 처음 집 떠나 생활하는 열여섯 어린아이를 강하게 단련시켰다. 아! 딱 일주일 살아보고 난 여기선 곧 죽어도 못 살겠다며 분연히 뛰쳐나오게 만든 중국 대학교 기숙사와 어지간한 벌레쯤은 우습게 여기게 만들어 준 필리핀 기숙학원에서의 6개월도 있었다. 돌이켜 쓰다 보니 내가 어지간한 환경에는 무던한 사람이 된 건 다양한 기숙사 생활 덕분인 것도 같다. 


그러니 방 두 개에 욕실, 거실, 주방에 창고까지 딸린 미국 대학교 패밀리 기숙사는 뭐, 말이 기숙사지 그냥 위치만 캠퍼스 내부인 커뮤니티 하우스와 다를 바 없었다. 이름부터도 M Apartments 니까. 물론 미국 가면 마당 있는 주택에 살 수 있을 거라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기에 실망도 크기는 했다. (미국 가면 마당 있는 주택에서 사는 줄 알았지)


기숙사에 도착하자마자 방 안에 고인 물웅덩이를 만났고, 사는 동안 방 하나를 보수 공사로 한 달 가까이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기에 지지리도 뽑기 운이 좋지 않다고 여겼었다. 살다 보니 기숙사 자체가 1973년에 지어진 터라 집집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문제를 가진 시한폭탄 같은 곳이라는 걸 알게 됐다. 우스운 건 우리 집은 누수 문제만 제외하면 욕실도 주방도 올 수리된 나름 최상급의 집이라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는 거다.


학부생들 기숙사는 캠퍼스마다 신축으로 지으면서도, 얼마 안 되는 석박사생들과 직원 가족들이 거주하는 패밀리 기숙사는 그들의 순위에서 밀리는 듯했다. 문제 A가 발생하면 그 부분만 손 보고 살다, 문제 B가 발생하면 다시 또 그 부분만 수리하는 식이니 기숙사 관리실은 항상 바빴다. 그러니 문제가 해결되기까지는 몇 번의 지난한 요청과 기다림의 반복이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낡은 기숙사 건물이 갖는 불편함을 제외하면 미국 대학교의 패밀리 기숙사는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가장 좋았던 건 역시 안전. 캠퍼스 안에 있으니 확실히 다른 지역보다 치안에 있어서는 걱정할 거리가 적었다. 아니 거의 없었다. 아이와 둘이서도 사람 한 명 없는 캠퍼스 산책로를 걸어도 불안하지 않았다. 


두 번째는 직주근접. 보통 기숙사생들이 느끼는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수업 시간 5분 전에 뛰쳐나가도 되는 초근접한 거리일 거다. 아쉽게도 남편 전공 건물들이 있는 캠퍼스와 패밀리 기숙사가 있는 캠퍼스가 달랐지만 그래도 이웃한 캠퍼스라 차로는 5분(주차장까지의 거리 고려하면 10분) 셔틀버스로도 30분 이내면 충분하니 복잡한 서울에서 출퇴근하던 때 보다야 나았다. 


차 없으면 이동하기 힘든 뉴저지에서 여차하면 걷거나 혹은 셔틀버스를 이용해 캠퍼스 내부에 위치한 저렴한 가격의 식당들이나 상점들을 이용할 수 있는 것 역시 좋았다. 대부분이 석박사생에 직원들 가족들이다 보니 자연스레 놀이터며 세탁실에서 맺을 수 있는 인연은 외국 생활의 큰 힘이 되는 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미국' 학교 '기숙사'이기 때문에 불편한 점들도 있었다. 첫 번째는 카펫 문화. 영국 학교 기숙사 역시 카펫 바닥이었지만, 비교적 신식이었던 그곳에서는 자연스레 신을 신고 방으로 들어오는 서양인들을 만날 일이 아예 없었다. 하지만 낡은 기숙사에서는, 비싼 스팀 청소기까지 구매해 며칠을 공들여 청소해 놓은 그 카펫이 하루가 멀다 하고 직원들의 작업화에 잔인하게 밟히고는 했다. 


누전이 되어 퓨즈 교환하러, 누수 확인하러, 히터 수리하러, 파이어 알람 테스트하러 심지어 전구 갈아주러 등등. 우리가 요청하거나 혹은 그들이 필요해 방문하는 경우 모두 정말 잦았다. 보통 한 번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동일한 문제로 몇 번씩 방문하는 것까지 따지자면 직원들의 방문 횟수는 헤아리기 어렵게 늘어났다. 


간혹 센스 있는 직원들은 '너네 혹시 내부에서 신발 신지 않고 생활하느냐' 물어주긴 했지만 대부분은 아무런 의식조차 없이 밖에서 걷던 그 신발 그대로 들어와 세 살 아이가 맨 발로 걷다 누워 뒹구는 카펫 위를 마구 걸어 다녔다. 단언컨데 눈이 내린 날이 가장 최악이었다. 


나중에서야 친구들의 조언을 듣고 일회용 덧신을 잔뜩 준비해 두었지만, 아쉬운 소리 잘 못하는 남편은 뒤로 한참 눈짓을 해도 못 본 척 입을 꾹 닫고 있었다. 내가 직접 말을 하기도 했지만 친구들의 말처럼 - 일부 국가 유학생들의 경우 본인 외에 가족들은 영어를 거의 못 해 의사소통이 불편하니 - 직원들은 으레 남편을 찾았다. 결국 그 덧신은 2년 내내 셀프 이발할 때 머리카락이 밟히지 않도록 우리 둘이 신는 것으로 그 쓰임을 다 했다. 






또 하나는 파이어 알람. 한 사람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좁은 주방에서 고기를 굽다보면 금새 매캐한 연기로 가득해져 툭하면 파이어 알람이 울려댔다. 미리 고백하자면 영국 기숙사에서 공용 주방에 계란을 삶아 두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알람이 울려 전체 기숙사생들을 모두 대피하게 만들었었던 화려한 전적이 나의 첫 파이어 알람이었다. 그러니 파이어 알람에 대해서는 일종의 노이로제 같은 것이 생겨 버려 알람이 울릴 때마다 일단 가슴이 덜컹했다. 


샤워중이거나 화장실에 앉아 있을 때 울리기라도 하면 머리가 흔들릴 정도로 요란한 그 소리를 생 귀로 견디며 최대한 빨리 추스리고 뛰쳐 나가야 했다. 기숙사 전체 파이어 알람을 실시할 때는 항상 소방대원들이 출동해 인원 체크까지 해야 완료가 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평소라면 절대 보이지 않았을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이웃들에게 보일 때도 왕왕 있었다.


시끄럽고 불편하기는 해도 그러려니 생각하면 나는 괜찮았지만, 문제는 세 살 아이였다. 집 밖으로 지나가는 오토바이 소리에도 놀라 귀를 막고 울어대던 예민한 청력의 소유자인 아이에게 파이어 알람은 사실상 '고문'이었다. 예고 없이 알람이 울릴 때면 아이는 늘 기겁해 온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사전 고지된 정기 파이어 알람 테스트는 친구 집이나 바깥으로 피해있을 수 있었지만, 고기 구울 때마다 아이만 바깥으로 내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미국은 목재로 지은 집들이 많아 - 기숙사는 아주, 몹시도 튼튼하게 방 안 쪽 벽까지 모두 콘크리트였지만 여하간 - 이렇게 화재 관리를 열심히 하나 보다 했다. 일반 주택에 사는 지인에게 파이어 알람이 10년 사는 동안 '처음' 울렸는데, 소방서에서 출동은 딱히 않더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주립 대학교 기숙사'라서 겪었던 불편함이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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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굳이 사소한 불편함 들을 부각해서 길게 적어 내려갔는지도 모르겠다. 미국의 모든 학교, 모든 기숙사가 같지는 않겠지만 사실 2년 가까이 패밀리 기숙사에 살며 느낀 건 '따뜻함'이었다. 낡은 건물이 불러일으킨 향수 같은 건 아닐 거다. 다양한 인종,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모여사는 그곳은 왜인지 80년대 내가 자라던 시골 마을 같은 느낌이 났다. 


도난 걱정 없이 고가의 자전거며 아이들 장난감을 현관문 앞에 턱턱 놓고 지내고, 나중에는 잠깐 나갈 땐 현관문을 잠그는 걸 잊고 살기도 했다. 새로 들어오고 나가는 이들이 많은 기숙사의 특성 때문이겠지만 쓸만한 물건들이나 옷가지, 장난감, 책들은 공용 세탁실을 통해 공유되었다. 기숙사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에는 주인이 불분명한 장난감이 어느 날엔가 등장해 그대로 모든 아이들이 갖고 노는 공용 놀잇감이 되곤 했다. 


놀이터 옆 바베큐장에서 누군가가 맛있는 냄새를 풍기면 지나가던 아이들이 자연스레 모여들어 같이 즐기기도 한다. 같은 전공이라, 같은 국적이라, 옆 집 살아서, 아이 유치원이 같아서, 놀이터에서 자주 보다 보니 등등 각양각색의 이유들로 한 집 건너 한 집은 서로 알고 지내는 곳. 


누구네 집 숟가락이 몇 개더라, 까지는 아니지만 서울 한복판에 살며 도시의 삭막함에 익숙해져 있던 우리에게 미국 대학교 패밀리 기숙사에서의 시간은 따뜻함으로 기억되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모두가 '어차피가 주는 자유로움' 덕분에 서로를 인간 대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옹기종기 모여 자리 잡은 3층짜리 기숙사 건물들과 건물 사이 작은 잔디밭





세 살 아이가 이렇게 누워 뒹굴고 있어도 

사뿐히 카펫을 즈려 밟고 가시던 모진 직원분들. 

아니, 그런데 미국 아이들은 기어 다니며 뭐든 빨아 대는 그 시기에 어떡하나요? 



오른쪽 사진 너무나 명확한 카페트 경계선(딱 주방 입구까지만 교체한 카페트)



누가 놓고 갔는지 모를 빨강 붕붕카는 모든 아이들의 공용차가 되었다. 

핼러윈에는 기숙사 돌며 trick or tr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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