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하바 Aug 22. 2021

필라델피아에서 크림치즈는 먹지 않았지만

아직도 우리는 뉴욕보다 필라델피아입니다.


2년 동안 뉴저지에 살았지만, 미국에서의 시간을 떠올리면 뉴저지보다 더 그리운 곳이 나에게는 필라델피아다. 뉴욕의 복잡함을 싫어하던 남편의 영향도 어느 정도는 있었을 테다. 가족 나들이할 때 운전대는 남편 담당이라 운전자가 싫어하는 곳을 가는 것은 모두에게 피곤한 일이었으니까. 물론 그건 부가적인 이유였을 뿐이다. 나는 필라델피아가 그냥 좋았다. 부끄럽지만 고백하자면 한참을 필라델피아와 펜실베이니아를 헷갈리곤 했다. 필라델피아도 그렇지만 우리가 가 본 펜실베이니아 주의 몇몇 도시들 모두 너무나 내 취향이었기에 이렇든 저렇든 어차피 좋으니 상관없겠지 싶었던 것 같다.


미국 생활에 관한 글들을 쓰기로 마음먹고서 가장 먼저 쓰고 싶었던 것은 사실 필라델피아 관련 글이었다. 20대 중반부터 시작된 나의 오랜 취미이자 부캐는 여행블로거다. 걷고, 사진 찍고, 기록하는 걸 워낙 좋아하니 브런치에 필라델피아 글을 쓰는 것도 쉽게 생각했었다. 그땐 미처 몰랐다. 너무 사랑하니까 '잘 쓰고 싶다'는 욕심이 더해져 그런지 첫 문장을 시작하기까지도 참으로 오래 걸렸다.


오죽했으면 이 글을 쓰기 전 검색사이트 세 곳에 들어가 '필라델피아'를 입력해 보았을까. 무려 세 곳이나 말이다!! (평소에는 대충 한 곳이면 족하다.)


필라델피아 크림치즈

필라델피아 반도체 지수

필라델피아 필리스

필라델피아 치즈케이크


등등이 연관 검색어로 뜬다. 세 곳 모두 순서는 달라도 얼추 위와 비슷한 모양이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필라델피아라는 도시의 이미지다. 사실 나도 그랬었다. 필라델피아는 '딸이 좋아하는 크림치즈가 유명한 곳' 정도로만 생각했다. 사실 뉴저지에서만도 갈 곳은 넘치게 많아서 굳이 다른 도시로 갈 거라면 당연히 뉴욕이지 싶기도 했다.


필라델피아라는 도시에 처음 매력을 느낀 건 아이를 위해 연간회원권을 끊고 찾은 뉴저지 캠든의 수족관 덕분이었다. 한국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하마가 있는 수족관도 좋았지만, 수족관 창문 너머 보이는 필라델피아의 풍경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허드슨 강을 따라 빼곡히 들어 찬 뉴욕의 스카이라인은 화려함으로 나를 압도했다면, 델라웨어 강가의 필라델피아는 오래오래 곁에 두고 보고 싶은 액자 속 그림 같은 느낌이었다.



필라델피아와 사랑에 빠진 순간




        




미국에서도 아이의 필라델피아 크림치즈 사랑은 여전했다. 미국에 가서야 알게 된 건데 필라델피아 크림치즈는 필라델피아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 아니었다. 우리나라도 음식 이름에 도시나 지역명을 붙이듯, 신뢰감을 주기 위해 필라델피아라는 지명을 붙였다 한다. 유명하다는 필라델피아 치즈 스테이크도 우리 입맛에는 영 그닥이었다. 한 때 냉동실에 쟁여두고 먹던 필라델피아 치즈케이크도 현지에서 먹으면 뭔가 좀 다를까 싶었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대신 목적지 없이 걷다 줄이 길까지 이어져 있어 궁금해 들어간 아이스크림 가게의 아이스크림 맛은 최고였다. 오바마 대통령이 먹었다는 미국 최초의 시장 격인 레딩 터미널 마켓의 필라델피아 치즈 스테이크는 별로였지만, 바로 옆 빵 가게의 와플 맛은 최고였다.


필라델피아를 찾는 관광객이라면 필수코스로 넣는 독립기념관이나 자유의 종도 딱히 우리 관심사는 아니었다. 뉴욕의 번잡함이 아닌 여유가 필요할 때 주로 필라델피아를 찾았기에 복잡한 다운타운이나 차이나타운은 아예 배재했다. 대신 이제는 찾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이탈리안 재래시장이나, 쇠락한 부두 창고를 개조한 델라웨어 강 따라 자리 잡은 pier 들을 찾았다. 빡빡한 스케줄 따라 움직이는 여행자가 아니니 봄에는 벚꽃 보러, 축제가 있으면 축제에 맞춰 필라델피아에 갔다. 뜨거운 여름에는 나무들 사이로 해먹이 빼곡히 걸린 델라웨어 강가의 공원이면 완벽했다.


필라델피아는 워싱턴처럼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동시에 보기 좋은 도시다. 워싱턴은 필수적으로 둘러볼 곳만도 너무나 넓어  때마다 규모에 압도당해 지쳤기에, 아기자기한 맛이 있는 필라델피아를 훨씬 사랑했다.


봄이면 미국 사람들은 벚꽃을 보러 워싱턴에 여행을 간다 했다. CNN에서도 꼽는 벚꽃 명소를 가진 한국에서 온 우리 눈에 찰 만한 예쁜 벚꽃길이 미국에 있을까 싶었다. 나의 대한민국 벚꽃 부심은 뉴욕 브루클린 보태니컬 가든에서 한 번 처참히 꺾였고, 필라델피아에서 또 한 번 손상을 입었다. 필라델피아 페어마운트 공원은 쇼푸조하우스라는 일본식 정원의 벚꽃에 바닥까지 닿을  흐드러진 수양 버들길, 멋스러운 외관을 가진 뮤지엄을 배경으로  벚꽃길까지 그야말로 벚꽃의 모든 것을 갖춘 곳이었다.



이탈리안 마켓 / 체리 스트릿 피어
Fairmount Park 벚꽃 축제 / 필라델피아 중국 유등 축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거리 Elfreth's Alley / 목적없는 산책 중 한 컷






필라델피아 주변까지 범위를 넓혀보면 기억하고 싶은 장소들은 더욱 많다. 애초에 내가 펜실베이니아주의 많은 곳들을 그냥 필라델피아로 통칭하고 살았으니 이 글에 펜실베이니아 여행지들을 함께 적어도 무방할 것 같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미국 전역에서 관광버스까지 대절해 공연 보러 온다는 sight & sound 공연장. 성경 인물들과 관련한 뮤지컬들만 올라가는데, 공연의 스케일이나 배우들의 연기는 브로드웨이의 그것보다 몇 배는 더 훌륭하다 싶었다.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기꺼이 추천하고 싶은 공연. 공연 보고 나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Shady Maple Smorgasbord 에서 뷔페 식사하는 것이 미국 기독교인들의 코스라는데, 우리 역시 만족스러웠다.


Sight & sound 공연장이 위치한 펜실베이니아 롱크스에는 전기와 기계 등 문명의 이기를 거부한 채 전통을 고수하며 살아가는 아미쉬 사람들이 모인 아미쉬 마을도 있다. 아미쉬 민박 집에서 숙박을 하거나 체험을 하는 것도 특별한 여행을 만드는 방법. 롱크스 근처 스트라스버그에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증기기관차를 직접 타 볼 수도 있고, 규모가 꽤 큰 기차 박물관도 둘러볼 수 있다. 랭커스터-롱크스-스트라스버그를 함께 묶어 필라델피아 근교 여행지로 강력 추천해 본다.



sight&sound / the Amish Village / Strasburg Railroad



그런가 하면 Pocono 지역도 좋다. 강원도 분위기의 울창한 산들로 둘러싸인 지역인데 자연 속 쉼을 갖고 싶을 때 미국 사람들이 찾는 곳이라고 한다. 산장을 빌려 여름을 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사람들도 여유 있고, 멋진 산 뷰를 가진 와이너리나 브류어리들도 많아 한 번쯤은 가 볼 만 여행지다. 펜실베이니아의 롱우드 가든 역시 엄청난 규모의 실내외 식물원인데 계절마다 바뀌는 테마로 미국인들이 사랑하는 장소라 한다. 아이와 함께 가기 좋은 크레욜라 체험관이 있는 작은 마을 이스턴도 좋았다.



Pocono MT. winery / Longwood Gardens / Easton.PA



그러니까 내가 펜실베이니아와 필라델피아에서 사랑한 장소들은 ‘외국인들이 미국에 여행 가서 흔히 찾는 장소’는 아닌 셈이다. 확실히 다양한 인종의 관광객들보다 미국인들이 많은 장소에서는 잠시나마 진짜 그곳에 속해있는 것 같아 더 좋았다. 2년이라는 기간이 정해진 해외생활은 참으로 특이했다. 하루하루 여행하듯 사는 건 좋았지만, 2년 내내 여행자의 어딘지 붕 뜬 마음만으로 살 수는 없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최고는 lantern festival이었다. 펜실베이니아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도 진행되는 축제 중 하나였지만, 부러 생일날에 맞춰 예약해 보러 갈 수 있는 건 역시 거주자만의 특전이었다. 넓은 초원을 가득 메운 사람들. 부드러운 색으로 하늘을 물들이며 넘어가는 태양. 저녁 어스름만이 가득하던 공간에 진행자의 안내에 맞춰 하나, 둘 솟아오르던 랜턴들. 평생 잊지 못할 생일의 추억 역시 펜실베이니아였다.








미국 생활이 첫 외국 생활이었던 남편은 언젠가 미국에서 살 거라고 농담 반 진담 반 이야기를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사는 건 싫고, 한 달 정도 여유로운 여행으로 펜실베이니아와 필라델피아는 꼭 다시 가고 싶다. 새로운 곳을 가도 좋고 추억의 장소를 다시 가는 것도 좋겠다. 꾸준히도 '미국은 이제 싫다'는 아이는 비록 필라델피아에서 만든 건 아니지만, 좋아하는 필라델피아 크림치즈의 그곳이라고 꼬드겨서 함께 가야지.


필라델피아는 그저 필라델피아라서 좋다.

이전 07화 그만 사랑하지 않은 뉴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