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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하바 Oct 20. 2021

뉴욕의 자유부인

잊을 수 없는 드래그 퀸의 추억


아이가 일곱 살이 되기까지 나에게는 딱 두 번의 자유부인의 밤이 있었다. 한 번은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 그리고 다음은 미국에서 귀국하기 전. 곁다리 미국 생활이 귀하디 귀한 자유부인으로 보낼 수 있는 밤까지 선물해 주었으니 감사할 일이다. 혹시나 싶어 덧붙이자면, 여기서 자유부인이란 정비석 작가의 소설에 등장하는 '그' 자유부인이 아니라 육아와 집안일로부터 해방되어 잠시나마 '자기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아내이자 엄마를 뜻한다.


귀국 전 미국에서의 자유부인은 무려 뉴욕이었다. 그것도 가장 가까운 친구와 함께하는 1박 2일.


친구 역시 나와 같은 나이의 아이를 키우고 있었고, 공부하는 남편들 덕분에 우린 대부분의 날들을 독박 육아로 보내고 있었다. 아내에게 자유부인의 밤을 선물하고자 호시탐탐 기회만 살피던 '친구 남편(안타깝지만 내 남편은 아님 주의)'은 우리가 귀국하기 전, 아내들끼리 멋진 시간을 보내라며 브로드웨이 한가운데 위치한 H호텔 1박을 통 크게 쏴주었다.


혼자 아이를 돌봐야 했다면 나의 자유부인의 밤을 절대 거절했을 내 남편에게는, 아내들이 없는 1박 2일 동안 함께 아이들과 동물원도 가고, 저녁도 같이 먹자며 거부할 수 없는 제안도 덧붙여주었다. 마지막 관문은 자타공인 엄마 껌딱지인 아이. 단짝 친구와 좋아하는 삼촌이 같이 동물원도 가고 재밌게 놀자 설득해 주니, 하룻밤 엄마의 부재와 꼼꼼히 저울을 재어보던 아이도 기꺼이 허락해 주었다.






뉴욕에서 잘 나가는 카페를 하는 친구의 친구와 만나, 뉴요커인 그녀가 추천하는 맛집에서 먹는 점심으로 자유부인 일정은 시작되었다. 멋쟁이 뉴요커가 추천한 식당이라 그런지 건강한 메뉴가 많아 만족스러웠다. 사실 매장을 가득 채운 대부분의 손님들이 그녀처럼 늘씬하고 세련된 모델 같은 사람들이라 괜히 나도 그 무리에 속한 듯한 기분이 좋았다.


후식은 미국 바리스타 대회에서 2등 한, 그녀 카페 직원의 훌륭한 라테아트가 곁들여진 고소하고 부드러운 커피. 시작은 완벽했다.





친구의 남편이 예약해 준 호텔은 방에서 보이는 뉴욕 시내 뷰는 물론이고, 위치가 정말이지 너무 완벽했다. 숙소 앞이 바로 브로드웨이. 브로드웨이 뮤지컬도 하나 볼 계획이었기에 창 밖으로 보이는 극장들을 보며 잔뜩 설레었다.


지금 와 생각하면 기왕 자유부인하러 나선 길이었으니, 그냥 제일 보고 싶었던 뮤지컬을 제 돈 주고 봤더라면 좋았을 것을. 뉴욕 뮤지컬들을 '래플'을 통해 저렴하게 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원래 티켓 가격을 주고 보려니 과하게 비싼 것처럼 느껴졌다.


요즘은 대부분 극장들이 온라인 래플로 변경했기에 자유부인의 밤 며칠 전부터 시도해 보았지만, 모두 탈락. 현장에서 직접 추첨하는 유일한 뮤지컬인 '위키드'를 마지막 희망으로 삼고 길을 나섰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두근거리며 기다렸지만, 역시 탈락.


그래도 아이도, 아이 짐으로 가득한 무거운 가방도, 유모차도 없이 카메라 하나 들고 발걸음도 가볍게 걷는 타임스퀘어는 마냥 신이 났다.








뮤지컬이 아니라면 뉴욕의 재즈바를 가자 싶었지만, 재즈바는 더 늦은 밤에 가기로 일단 보류. 알록달록 컬러풀한 사진 찍기 좋을 전시를 친구는 가고 싶어 했지만, 아이들 없이 우리 둘이서는 왠지 어색할 것 같아 또 패스.


예전에 친구네와 함께 타보려다 날짜를 착각한 나의 실수로 타보지 못한 뉴욕 더라이드 투어 버스가 생각났다. 예약을 하려고 홈페이지를 둘러보다 매 달 셋째 주 금요일에만! 딱 두 번 운행된다는 '퀸 오브 더라이드'라는 걸 보게 된 거다. 심지어 탑승 전, 후로 연계된 바에서 무료로 음료도 제공한단다.


설명을 제대로 읽어 보지도 않고, 영상 한 번 찾아볼 생각도 않고 바로 예약해 버린 게 실수였다. ‘퀸’이라기에 일반 더라이드 투어보다 더 좋은 걸로만 생각했다. 태생이 블로거라 한 달에 딱 한 번 탈 수 있는 퀸 오브 더라이드를 타고 후기 남긴 사람은 없겠거니 싶어 좋은 포스팅 거리가 되겠다며 흥분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공짜 술에 혹한 것도 있고.



모두가 어색하게 앉아만 있던 바의 무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건 버스에 탑승하고 난 후였다. 어딘지 이상한 복장의 진행자는 처음부터 두 명의 동양인 여자들에게 묘한 눈빛과 농담을 건넸다. 뭔가 이상하다 싶었지만 이미 버스는 출발했고, 더라이드 투어 영상에서 많이 보았던 첫 번째 출연자가 등장하고는 그의 랩에 열광하며 이내 마음을 놓았다.


딱 거기까지였다.


이후로는 여장 남자 출연자들의 기괴하고 부담스러운 무대만이 계속됐다. 진행자는 아무에게나 가서 덥석 무릎 위에 앉아 19금 농담을 해댔고, 이게 가장 중요한 거라며 ‘드래그 네임’을 빨리 알려 달라 재촉한다.


투어버스 안의 탑승객은 딱 두 무리로 나뉘었는데, 우리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타서 당황해하고 있는 무리와 아예 제대로 즐기려고 탄 동성애자나 양성애자, 게이 커플들.


나중에서야 찾아보고 안 건데 ‘퀸’은 엔터테인의 목적을 위하여 여장을 하고 공연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있단다. ‘킹’은 그 반대. 진행자와 탑승자들이 주고받는 농담들마저도 너무나 그쪽이라, 아예 이해도 못 했던 말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이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때마침(?) 비까지 쏟아져 내렸다. 뉴저지에도 비가 왔던 모양인지 내내 잘 놀던 아이는 갑작스러운 천둥소리에 놀라 울며 엄마를 찾았다. 덕분에 나는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열연을 하는 여장남자들의 길거리 공연과, 민망한 복장의 진행자가 화면에 잡히지 않도록 애를 쓰면서 영상통화를 하며 우는 아이를 달래야 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친구는 난생처음 겪어보는 일에 너무나 놀라 호텔로 돌아와서도 쉬이 진정이 되지 않는다 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탑승  무료 음료도 마시지 않았고, 뒤로 미뤄두었던 재즈바에도 가지 못하고 바로 숙소로 돌아올 만큼  오브 더라이드의 충격에 빠져 있었다.


그래도 그냥 자기엔 아쉬우니 영화라도 한 편 보자며 선택한 것이 하필 ‘보헤미안 랩소디’. 그저 주위에서 다들 재밌다기에, 둘 모두 마침 그 영화를 보지 않았기에 내용은 전혀 모른 채로 일단 20달러나 내고 선택한 건데. 이 무슨 우연의 일치인지.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는 그쪽으로(?) 전혀 문외한인 아줌마들을 위한 복습의 시간이었나 보다. 영화를 보고 나서야 왜 우리가 탄 버스가 ‘퀸’ 오브 더라이드였는지, 진행자가 왜 그렇게 ‘드래그 네임’을 강조한 건지 뒤늦게 이해하고는 박장대소.


여하간 아이들과 함께라면 절대   없었을 경험을, 그것도 매우 뉴욕스러운 경험들로 가득한 밤이었으니 그걸로 되었다며 긍정 회로를 돌려보는 자유부인들이었다.








첫 째 날 밤의 충격 덕분인지, 혹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둘째 날에는 모든 것들이 좋았다.


전 날 새벽까지 수다 떨다 잠들었지만, 아침에 엄마가 없으면 우는 아이 때문에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호텔 헬스장에서 새벽 운동도 좋았고, 느긋한 조식도 좋았다.


유난히 파란 하늘도 좋았고, 목적지 없이 걷는 소호의 공기도 좋았다. 유행한다는 물고기 모양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다음번엔 아이랑 남편이랑 꼭 같이 오자 다짐하기도 하고, 사지는 않았지만 화장품이니 옷이니 내 물건들을 구경하는 것도 좋았다.








사실 내 자유부인의 가장 큰 복병은 남편이 아닌 아이가 맞다.


미국 출국 전 자유부인 여행에도 고작 세 살 난 아이는 “나는 둘리 같아. 엄마하고 헤어지니까.” 하며 울어댔었다. 두 살 더 많아진 이제는 좀 나아졌으려나 했는데 한밤중의 영상통화에 이어, 다음 날엔 한글학교 선생님 폰으로도 영상통화를 걸어왔다.


이럴  알았으면 엄마  보낼  그랬다.” 시작부터 슬픈 영화  주인공 같은 대사를 던지더니,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합한 것보다  엄마가 좋은데..”, “엄마 사랑해, 보고 싶어.” 애절한 사랑을 고백해댔다.


동물원에서 집에서 친구랑 정신없이 재미있게 놀고, 한글학교에서도 아빠랑 신나서 수업하던  사진으로  봤지만! 그래도 이렇게 엄마 사랑  절절해지니 자유부인은 나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아이를 위해서도 가끔  필요한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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