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알아보는 비슷한 성향의 아이들
"저 그런데 선생님, 혹시 미스 엉구아가 누구인지 아세요?"
유난히 엄마와의 분리불안이 있는 아이였다. 한국에서조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기관 생활. 당시 즐겨보던 책의 영향인지, 만 세 살이 된 생일 무렵 유치원에 다니고 싶다고 했다. 차로 고속도로를 달려 20여분 거리의 한인 교회에서 운영하는 몬테소리 스쿨을 택했다. 탐색하고 적응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한 데다 예민한 기질의 아이를 위한 선택. 한국인 선생님이 계신 곳이라면 조금은 수월하게 적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첫날 의외로 웃으며 미국인 선생님 손을 잡고 교실로 들어간 아이는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이후는 거의 비슷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집에서부터 울며 가는 날도 허다했고, 교실 앞에서 들어가기 싫다는 아이와 실랑이는 매일 20분쯤 비슷하게 반복되다 선생님 품에 안겨 들어가는 날이 많았다. 고작 두 시간 반 유치원에서 보내는데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출혈이 심했다. 그래도 끝날 때에는 항상 웃으며 세상 뿌듯한 얼굴로 나오는 아이를 보며 한국이었어도 마찬가지로 필요한 적응기간이려니 생각했다. 물론 너무 많이 울어 눈꺼풀에 상처까지 생겨 오던 날에는 많이 고민도 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아이는 나에게 있었던 일들을 종알종알 잘 전달한다. 아이의 유치원 이야기에 자꾸만 등장하는 미스 엉구아. 나는 미스 엉구아가 좋아. 친구들이 미스 엉구아한테 이렇게 이야기했어. 대체 미스 엉구아는 누구란 말인가. 내가 아는 한 선생님 중에도 친구들 중에도 엉구아라는 이름은 없는데 말이다. 본인의 아이는 내 아이보다 더했었다고. 꼬박 1년을 울며 등원했다고. 예민한 아이를 키워봐서 아는데 장점이 더 많은 아이들이라고. 믿고 기다려주면 된다고 늘 마음으로 지지해 주던 아이의 담임 선생님께 어느 날 물었다. 미스 엉구아가 대체 누구냐고. 선생님은 웃으며 대답했다. "저예요. 한국 이름 Eunhwa를 아이들이 보이는 대로 읽어서 자꾸 엉구아라고 하네요."
미스 엉구아에게 아직까지도 고마운 일이 있다. 바깥 놀이 시간, 아이는 선생님에게 말하기가 부끄러워 화장실 가고 싶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했다. 그래도 바지에 실수하긴 싫었는지 그 자리에서 쪼그리고 앉아 큰 일을 보았단다. 실수로 젖은 옷과 신발을 다 닦고, 옷을 갈아입히고, 놀이터 뒷자리까지 수습한 건 미스 엉구아였다. 몇 번이고 괜찮다고 그럴 수 있다고 아이를 다독여 주시고도, 아이가 놀랐을까 걱정되어 마음을 써 주셨다.
나중에 지인들에게 이야기를 전했더니 본인의 아이도 당장 이 유치원으로 옮겨야겠다고 했다. 미국 유치원에 다니는 지인의 아이도 비슷한 일을 겪었는데, 선생님들이 아무도 뒤처리를 도와주지 않아 아이는 엄마가 올 때까지 화장실 안에 혼자서 기다리고 있었단다. 지인을 더욱 속상하게 했던 건 철부지 아이가 엄마를 기다리다 너무 지치고 심심했던 나머지 화장실 벽에 본인의 똥으로 칠을 하며 놀고 있었다는 것. 선생님들은 몸서리를 치며 얼른 저거 다 해결하고 저 애도 얼른 데려가라고 했단다.
왕복 40분 거리의 유치원, 집에 다녀오기에도 애매한 거리라 약 두 시간 동안 주로 도서관이나 근처 카페에 있어야만 했던 날들이지만 미스 엉구아 덕분에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투자였다.
어느 날 미스 엉구아가 메시지를 보내주셨다. 엄마와는 분리하는 데 성공했지만, 대신 한국 선생님들과 떨어지지 않으려 하던 아이가 이제는 친구와도 잘 논다는 내용이 덧붙여진 동영상이었다. 금발 머리의 여자아이와 나란히 앉아 서로 말도 통하지 않는데 같이 책을 읽으며 아이는 웃고 있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늘 진행하는 바깥 놀이 시간에도 두 아이들이 함께 있는 날들이 많았다. 어느 날엔가 금발 머리 아이의 엄마에게 혹시 이 영상 봤냐며 말을 건넸다. 아이의 엄마는 나보다도 더 놀란 눈치였다.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의 언니에게 "너 애비게일이 유치원에서 말도 하는 거 알았어?" 묻는다.
그녀의 아이와 나의 아이는 몹시도 비슷했다.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는 몹시 조용해 존재감이 잘 느껴지지 않는 아이. 반면 집이나 익숙한 공간, 익숙한 사람과 있을 때는 마치 완전히 다른 아이처럼 활발하고 밝고 에너지 넘치는 아이. 둘은 교실 구석 소파에 앉아 같이 책을 보거나, 놀이터에서도 미끄럼틀 아래 조용하고 독립된 공간에서 자주 함께였다.
"애비게일 한국어 할 줄 알던데?"라고 자꾸 주장하는 아이 이야기를 통해 짐작해 보건대, 둘이 제대로 의사소통이나 하고 있었을까 싶지만 그래도 스스로 만들어 낸 둘만의 세계에서 두 아이 모두 행복해 보였다. 여러 이유로 아이는 미국 체류 2년 중 단 5개월도 채 되지 않는 시간만을 기관에서 보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미스 엉구아와 애비게일이 아이에게 긍정적인 기억을 심어주었음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