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나리타공항에서 익스프레스 넥스를 타고 한 시간가량 달려 시부야역에 도착했다. 이제 숙소로 짐을 맡기러 가야 한다. 지도를 본 나는 시부야의 스크램블 교차로가 얼마나 복잡할지 상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버스정류장을 헤매며 찾을 바엔 20분간 걸어 숙소에 도착하는 길을 택하기로 했다. JR철도를 벗어나 지상으로 올라온 나는 엄청난 인파에 압도당해 버렸다. 사람이 많을 줄은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토요일 낮 시부야의 거리는 크리스마스 날 명동 거리를 방불케 했다. 그곳을 빠르게 빠져나와야만 했다. 15분 정도 걸어 지도에 표시된 노란색 구역을 벗어나니 사람이 줄어들면서 길이 좁아졌고, 상점도 뜨문뜨문 있었다. 동네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내가 상상했던 도쿄의 거리가 거기에 있었다. 한적해진 길에는 나무와 함께 장식해 놓은 파란 셔츠와 회색 리넨 원피스를 걸어놓은 빈티지 상점, 퇴근 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작은 바, 영어로 'Post office'라고 쓰인 빨간 우체국, 뉴질랜드산 키위와 오렌지빛 자몽, 필리핀산 파인을 진열해 놓은 슈퍼마켓을 본다. 사람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도시의 골목이 좋다.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걷다 보면 다음에는 어떤 장면이 내 눈앞에 나타날까. 테이크아웃만 가능해 보이는 작은 커피숍을 눈여겨봤다. 여기 동네에 머물면서 내가 아침마다 라테를 마실 곳으로 점찍어 두었다. 짐을 숙소에 맡기고 두 손 가볍게 다시 길을 걷고 싶었다.
#02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첫 지하철 탑승. 72시간 교통권을 교환하려고 요요기 하치만 역으로 갔다. 씩씩하게 걸어간 지하철역에서 역무원이 여기는 교환이 어렵고 도쿄 메트로라는 라인으로 가야 한다, ‘계단을 내려가 왼쪽으로 일 분만 걸어가면 된다.’,라고 쓰인 푯말을 가리키며 알려주었다. 서울에 있는 지하철처럼 호선이 연결된 게 아니라 아예 밖으로 나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아니, 도대체 여기 근처에 메트로가 또 어디 있담. 계단을 내려가 한참 시간이 지났는데도 메트로를 보지 못한 나는 결국 유모차를 끌고 있던 현지인 남자에게 길을 물었다.
“여기 근처에 도쿄 메트로가 있어?”
“응, 있지! 저기 슈퍼마켓 보이지?”
내가 숙소 가는 길 두 번이나 지나쳤던 동네 슈퍼마켓이었다.
“거기 바로 옆이 도쿄 메트로야.”
“(아, 정말?)”
그렇게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본 곳에 떡하니 메트로 입구가 있었다. 서울에서는 절대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에 메트로 입구가 자리 잡고 있다. 아니, 왜 입구가 이렇게 상점이랑 바로 옆에 붙어 있어? 도쿄는 어렵다. 처음이라서 어렵고 복잡해서 어렵다.
#03
어제도 자전거를 타고 오늘도 자전거를 탄다. 자전거를 하도 탔더니 엉덩이가 뚫릴 지경이었다. 다시 복잡한 메트로를 헤매며 다니느니 몸은 좀 고생하더라도 길을 그나마 쉽게 찾을 수 있는 전기자전거를 택했다. 여행을 하러 온 건지 자전거를 타러 온 건지 자전거를 타지 않으면 여행하기가 힘들었다. 드디어 오늘 마지막 목적지인 요요기 공원에 도착했다. 호수 앞 벤치에 앉아 팔 한쪽을 나무 등받이에 걸치고 오른쪽 다리는 왼쪽 다리에 올려놓은 채 편의점에서 사 온 소다 맛 사이다를 들이켰다. 하, 이제 좀 살겠네. 10m 떨어진 곳에 (마치 해변 앞에서) 웃통을 벗고 돗자리 위에 일광욕을 즐기는 외국인이 보인다. 벤치에 앉은 사람 중 분주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책을 읽거나 사색에 잠겨 있거나 작은 말소리로 서로에게 말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뒤 나는 책을 펼친다.
여행지에서 지루한 책이나 원하지 않는 책을 읽는 것보다 더 비통한 일이 있을까. 이리도 좋은 시간엔 아껴 읽을 만큼 재미가 보장된 책이 필요하다. 여행 전 지루하지 않은 책을 찾기 위해 나는 필사적이다. 멀찌감치 떨어진 왼쪽 벤치에 내 또래 일본 남자가 앉았다. 나처럼 책을 들고 있다. 그가 읽는 책을 흘긋 보며 그가 일본 사람인 걸 알았다. 그 남자와 나는 벤치에 나란히 앉아 책을 읽었다. 바람이 불어와 살결을 시원하게 때린다. 잠깐도 아니고 여러 번 되풀이해서. 자전거를 타느라 이마와 등 뒤에 맺혔던 땀이 솔솔 날아가고 연못 가운데 치솟는 분수 물줄기 물방울이 미풍을 타고 내 얼굴에 안개 분사처럼 뿌려진다. 여기가 천국이었는데 도대체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다 이제야 왔을까. 그놈의 오므라이스가 뭐라고.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다시 책에 집중한다. 잠시 내가 도쿄에 있다는 걸 잊은 채 책을 읽는다.
내가 여행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살던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기’이고 다른 하나는 ‘책’이다. 도쿄에서 책을 읽고 있는 나는 여행을 하며 한 번 더 여행하는 셈이 된다. 다른 세계에 있다 눈을 떴는데 여전히 또 다른 세계에 머물고 있다. 여행지에서 책을 읽는 행위는 내게 또 다른 쉼이다. 책 중에서도 아껴두며 읽고 싶었던 책 또는 쉬운 책을 골라 간다. 너무 바삐 돌아다니지 말고, 책을 읽으며 어서 그만 쉬라고 내게 말한다. 바람이 불어오는 적당한 온도, 나 말고 벤치에 앉은 사람들 얼굴에도 여유가 묻어나 보인다. 이곳보다 책을 읽기에 좋은 장소가 또 있을까.
#04
온몸과 얼굴에 문신을 한 채 닥터 훈스를 산책시키는 사람, 아직 혼자서는 탈 수 없는 세발자전거에 앉아 있는 어린아이를 뒤에서 미는 금발 머리 엄마, 요요기 공원 테이블 벤치에 앉아 노트북을 하는 사람, 아직 여름이 채 가시지 않은 도쿄, 오후 2시 40분, 땀을 뻘뻘 흘리며 러닝복을 정직하게 갖춰 입고 공원을 달리는 사람. 국적도 생활 방식도 다른 사람들이 자유롭게 각자 할 일로 바쁘다. 자전거를 타고 요요기 공원을 거닐며 일상을 살아내는 사람들을 훔쳐본다. 행사 부스에서 따로 떨어져 나와 유니폼을 입은 채 휴대전화를 들고 근심 서려 있는 표정으로 전화를 받는 한 사람이 눈에 보인다. 그 사람을 서울에서 지내는 한 사람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느꼈을 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마치 나 혼자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잠깐 머물다 가는 것처럼 한발 물러난 채 그들을 관찰한다. 도쿄만의 작은 세계를 내 프레임 안으로 들여오는 일. 그건 여행하는 일이다. 너무도 복잡한 도쿄지만 복잡함을 이해할 만큼 문화도, 표현하는 방식도 다채로운 삶의 모습이 공존해 있는 도쿄. 그 안에서 나는 오늘도 내게 둘러싸인 작은 세상을 구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