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보다 진한 건 통장에 찍힌 숫자의 잉크
자동 출입국 심사대를 통과하기 전 등록 데스크라고 쓰여 있는 표지판 앞에서 김 대표가 갑자기 멈춰 서서 "늘"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이곳을 통과하면 그림자 세상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림자 세상에 들어가면부터는 인간“늘”씨가 아닌 그림자 "김 하늘"씨로 생활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원래 이름이니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차차 설명하기로 하고 혹시 현실세계에 남길 마지막 메시지가 있다면 이곳에서 편지를 쓰셔도 좋습니다. 아시다시피, 요즘은 워낙 그림자 배달비가 비싸서 여건상 당신이 원하시는 그곳 한 장소만 발송을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아무래도 오후 9시가 지난 시간인 야간에 투덜 쟁이 그림자들을 겨우 달래서 다시 현실세계로 다녀오라고 하는 건 쉽지 않거든요. 특히 당신이 선택할 그녀의 그림자는 말이죠."
김 대표는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더니 "늘"에게 하얀 종이 한 장과 검은 봉투 그리고 모나미 한 자루의 펜을 쥐여 주며 돌아섰다. 갑자기 자신의 손에 쥐어진 편지에 "늘"은 당황하였지만 누구에게 편지를 써야 할지는 분명했기 때문에 무슨 말을 써야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늘" 옆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갑자기 나타났다.
얼핏 그 그림자를 보니 키는 "늘"보다 작아 보였으며 냉소 가득한 눈에 삐쭉 나온 입 그리고 늘 한쪽 다리 비딱하게 서 있는 모습까지 딱 첫째 "주연"의 그림자였다. 삐딱하게 서서 냉소 가득한 눈으로 "늘"을 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는 ”늘 “을 향해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누구한테 쓸지를 고민하는 거야? 말도 안 돼 너는 당연히 주연한테 써야지! 너를 먹여 살리려고 하루 종일 발바닥에 땀이 나게 뛰어다녔는데.. 뭐 나한테는 나쁠 것 없는 일이지만 말이야 “
어떻게 그림자나 그 주인이나 저렇게 같은 말을 할까 목소리까지 비슷해서 소름이 돋는 "늘"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그녀에게 쓸 생각이었던 "늘"은 주연에게로 시작하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안녕 주연! 나야 "늘"
여기서는 "김 하늘"이지만 말이야
잘 지내지? 내 걱정에 잘 못 지내나?
라고 썼을 때 다시 주연의 그림자가 그 편지를 힐끗 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끼어들었다.
"야 너 그거 다시 써! 너는 모르겠지만 개 맨날 내가 퇴근할 때마다 네가 없어져서 앓던 이 하나 빠진 것 같이 시원하다고 소리 지르던데? 괜한 걱정을 하덜덜을 말아!"
"아... 그렇구나.. 그게 주연이지!"
“늘”이 글을 쓸 때마다 자꾸 끼어드는 주연의 그림자를 참다못한 김 대표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입에 지퍼를 채우는 듯한 동작을 취하자, 주연의 그림자는 마치 자신의 입에 지퍼가 채워진 듯 조용해졌다.
그렇게 "늘"은 조용해진 주변 환경 때문이었는지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아 주연에게 보낼 내용을 적어 검은색 봉투에 넣을 수 있었다. 다시 김 대표가 주연의 그림자를 쳐다보며 지퍼를 여는 듯한 동작을 취하자 주연의 그림자는 "하~" 하고 숨을 몰아 쉬며, ‘쿵쾅쿵쾅’ 과한 고릴라의 몸짓을 하며 "늘"에게 다가왔다.
"너를 위해서 내가 움직인다고 착각하지 마! 나는 단지 김 대표가 이 배달 일을 해주면 보너스 2배로 준다고 해서 하는 거야 “
그리곤 "늘" 손 위에 있는 검은색 봉투를 낚아채더니 입술을 삐쭉 내밀고 뒤돌아서 가려고 하다가 무언가가 생각난 듯 다시 뒤돌아서 "늘"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아! 그리고 김대표가 내가 준 이 돈이 너에게는 빚이 된다고 한다고 하던데.. 게으른 "늘" 네가 갚을 수나 있을 까? 깔깔깔깔 맨날 불쌍한 주연이 너를 챙기는 모습에 고구마 백 개 먹은 기분이었는데, 오늘은 아주 편히 놀겠어 깔깔깔깔 너도 이제 알아야지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걸 말이야 맨날 집에서 빈둥빈둥 놀던 네가 갚기에는 큰 액수일 거야 깔깔깔 쌤통이다!"
"뭐?.. 그게 무슨.. 나는 김 대표가 쓰라고 해서 편지를 쓴 것뿐인데 빚이라니.. 그리고 주연은 내 가족인데.. 안부정도는 알려줄 수 있는 거잖아 이곳도 내가 원해서 온 것도 아닌데.. “
"늘"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시작부터 빚을 지고 해야 한다는 그림자의 말에 당황스러워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그림자는 콧방귀를 뀌며
"야 “늘” 니들 세계에는 너희들의 법이 있듯이 이곳 그림자 세상에서도 이곳 만의 룰이 있어. “No Pay, No Gain” 우린 공짜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
"그래도.. 아니..."
"그리고 그 말은 네가 더 잘 알 텐데 주연이 맨날 하는 말 그거… 뭐더라 있잖아… 그거”
"아.. 어 피보다 진한 건 통장에 찍히는 숫자의 잉크라는 말?"
"맞아! 가족보다 진한건 돈이 찍힌 숫자지! 그럼 그림자 세상에서 생긴 빚을 잘 갚아 보라고 아마 갚기 전까지는 어디도 못 갈 테지만.. 그럼 빠이 차오 안녕~"
아무런 말대꾸도 못한 "늘"은 사라지는 주연의 그림자를 보고 어쩌면 그 주인보다 더 얄미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주연의 그림자가 사라지자 뒤에서 기다리던 김 대표는 "늘"에게 다가와 “늘”의 어깨를 두들기며 자동 출입국 심사대 쪽으로 안내하였다.
“아니.. 제가 빚을 지고 시작하는 건 너무..”
“다들 다 빚을 지고 이곳 생활을 시작합니다. ”늘“씨라고 예외는 없죠.”
“늘”은 실실 웃고 있는 김대표의 얼굴을 보고 순간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의 몸은 어느새 자동 출입국을 지나서 불빛이 번쩍이는 상가들이 빼곡히 눈앞에 그림자 세상이 펼쳐졌다. 나지막하게, 신기한 노랫소리가 계속해서 그림자 세상에서 반복해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순수한 그림자로
태어난
그들의 운명은
늘 그들의 주인에 의해 정해지지
주어진 하루를 열심히 보낸 이의
그림자에게는
최고의 보상이 주어질 것이고
하루 종일 움직이지 않고 어두운 상념만을 붙잡고 있는 이의
그림자에게는
그들의 모든 것을 빼앗을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그림자 세상"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상상했던 그림자 세상은 어둡고 음침한 곳에 검은색 그림자들만 돌아다니는 모습이었지만 실제로 마주 하게 된 그림자 세상은 온갖 유명 맛집, 오락실, 노래방, 상가들, 서점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 가게들이 있는 마치 현실세계의 라스베이거스를 연상케 했다.
김 대표는 그런 광경에 이제는 출입구를 통과하면서 인간 “늘”이 아닌 검은색 그림자가 된 "하늘"이 자신의 모습에 놀라서 두리번두리번 대자 간단한 설명을 해 주기 시작했다.
"그림자 하늘 씨 놀랐나요? 그림자 세상에 왔으면 당신도 그림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 제가 당신을 한번 그림자 세상에 맞게 바꿔보았어요. 그래도 놀라지 말아요. 다른 건 인간세상과 거의 같아요. 다른 점은 모든 가게가 무인이라는 것 그리고 인간 세계에 있는 실제 있는 곳만 불러올 수 있는 곳이라는 점과 이곳에서는 소비만 가능하다는 점이랄까요?"
"소비만요?"
"네 그림자들은 오직 인간을 통해서만 돈을 벌 수 있어요. 그래서 인간이 그들의 주인인 거죠 그 주인이 에너지를 쓴 만큼 돈을 벌고 그림자 세계에 들어와 돈을 쓰는 게 이곳의 룰이에요"
"이상한 주인을 만나면요?"
"그것도 그림자의 운이죠 뭐"
그 말을 듣자마자 "하늘"은 갑자기 자신의 그림자가 불쌍해졌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가 매일 "하늘" 때문에 현실세계에서 한 푼도 벌지 못해서 다른 그림자들의 텐트에 기웃 거리며 잠들지 못하는 자신의 그림자 모습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하늘"의 생각을 읽었는지 김 대표는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 하늘 씨의 그림자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당신은 인간인 동시에 그림자의 운명을 한 몸에 모두 갖고 태어난 특별 케이 스니까 말 이에요 “
그 말이 끝나자 '씩' 이를 보이며 웃어 보였다.
'특별 케이스라...'
그림자 "하늘"은 왠지 특별 케이스라는 말이 섬뜩하게 들려왔다. 때마침 김 대표는 목적지가 다 왔는지 멈춰 서서 "여기예요"라고 말했다.
김 대표가 멈춰 선 그곳은 그림자 세상 입주자 대표 사무실이라고 쓰여 있는 간판이 걸려 있는 빨간 벽돌 건물이었다. 그리고 김 대표는 그 건물 지하 1층을 안내하며 "하늘"에게 먼저 내려가라고 손짓했다.
대표 사무실이라고 쓰여 있는 회색 문을 열자 파란색 불빛이 비추는 수족관이 정면으로 보였다. 그 수족관 안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상어들이 먹이를 깔깔깔깔 이상한 웃음소릴 내며 찾아다니며 헤엄치고 있었으며 그 속에 작은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그 상어들을 피하기 위해 열심히 헤엄치고 있었다.
수시로 그 수족관의 안의 모습은 깜빡깜빡 거리며, 다른 장소의 물속을 보여주듯이 바뀌고 있었고 바로 옆에는 깨진 유리 거울이 있었는데, 실금이라 하기엔 선명한 줄들이 계속해서 쫙 쫙 그어지고 있었다. 그 거울 바로 옆에 김 대표가 서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하늘 씨 이 거울이 보이세요? 보통 거울의 특징은 무엇이든 형체가 있는 것을 비춘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저희는 거울 안에서는 현실 세계를 거울 밖인 이곳 그림자 세상을 관리하죠. 혹시 그 말 알아요? 불행과 행복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는... 이곳이 그런 곳이에요. 현실 세계와 그림자 세상은 거울의 양면인 거죠. 그렇게 영원히 유지될 것 같은 두 세계의 평화가 깨지기 시작한 건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예요.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9월 1일 오전 09시 01분"
그때 갑자기 억울해 보이는 검은 개가 비도 오지 않았는데 수족관을 통과해서 김대표 옆으로 우산을 들고 나타났다.
하지만 "하늘"은 그 개가 나타났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김 대표가 말한 날짜를 듣고 소름이 돋았기 때문이었다. 그날은 "하늘"이 태어난 날이었다.
"그.. 날은?"
"맞아요. 현실세계에는 인간 "김 늘"씨가 태어난 날 그리고 그림자 세상에서는 "김 하늘"씨가 태어난 날이었어요. 인간과 그림자의 운명을 모두 한 몸에 갖고 태어난 당신으로 인해 비극이 시작되었죠. 아니 당신의 그림자 어머니로 인해 혼돈이 시작되었다는 게 맞겠네요"
"네?"
"원래 그림자는 인간이 태어나고, 여기 그림자 세상에서 그 인간에 맞는 그림자를 선택해서 그들을 묶어주면, 한 사람의 인생의 여정이 시작되는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달랐어요. 태어난 순간부터 그림자와 인간이 이미 짝이 되어 태어난 거죠. 그리고... 당신 어머니의 그림자는 자신의 자식인 그림자가 인간에 의해 지배되어 하루 종일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인간을 따라서 움직이는 인생을 살게 하고 싶지 않으셨던 거죠."
"그럼..?"
"인간 아이를 여기 그림자 세상에 데려왔어요"
"!!!!!!"
김 대표는 그 아이가 당신이에요 라는 표정으로 그림자 "하늘"을 쳐다봤다. 김대표의 파란 눈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가슴속이 하얗게 텅 비어 있었다. 영혼이 없는, 응당 인간이라면 있어야 할 곳에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그 모습이 마치 김 대표 옆에 계속 깨지고 있는 거울과 같게 느껴졌다.